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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orean Med Assoc > Volume 64(11); 2021 > Article
한국 최초의 공중보건학 박사 김창세: 세균학과 위생학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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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미증유의 대재앙 앞에 고뇌하고 절망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의료제도나 공중보건/공중위생 분야에서 일부 앞서 있다고 회자되기도 했지만, 방역과 거리두기, 백신과 치료 등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위기 앞에 절치부심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공중보건학 박사인 김창세는 보건학의 개척자이자 도산 안창호의 손아래 동서이며 독립유공자로서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공중보건 활동을 통한 독립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도전한 인물이다. 특히 전염병 위기 상황에서 공중보건학과 예방의학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세균학과 위생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일익을 담당한 김창세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이르러 타계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부분적 영문 자서전, “김창세, 어느 한국인 의사의 무제(無題) 회고록(Kim, Chang Sei, Untitled Memoirs of a Korean Physician)” (이하 회고록)이란 문서가 현재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Stanford Hoover Institution)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발견되고 해독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베일에 가려졌던 그의 생애의 단면들이 다소 이해되기에 이르렀다[1].
김창세는 한국재림교회(안식일교회) 배경에서 성장하고, 어린 나이에 1904년 고베의 고베중학교(神戶中學校)를 다니며 일본어를 배웠다. 한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도일하여 도쿄 세이소쿠학교(현 正則高等學校)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수학하는 등 4년에 걸쳐 일본 유학을 두 차례나 경험했다. 이어 서울의 영어학교와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현 평양 순안비행장 터인 순안의명학교(현 삼육대학교) 교사를 역임한다. 이어서 세브란스연합의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한다.
특히 언어 재능이 특출하여 영어의 경우 얼굴을 보지 않고 듣는 그의 발음은 본토인처럼 들릴 정도였고, 연합의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답사를 원고 없이 영어로 해서 참석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또한 일어와 중국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외국어 공부가 취미로 독일어, 스페인어, 불어 및 러시아어를 배웠다. 이런 재능은 후에 자신의 외국 유학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을 위한 국제학회나 국제회의에서 절절한 발표 및 도산 안창호 구출을 위한 변호 활동 등 국위 선양의 기반이 되었다.
김창세는 의학교 졸업 후 현 평양 순안비행장 터의 순안병원(현 삼육서울병원/서울위생병원 전신)에서 근무한 뒤, 중국 최고의 의료기관이었던 상해/상하이 홍십자병원(紅十字病院)/홍십자회총의원(紅十字會總醫院)에서 3년간의 의학연수를 하게 된다. 그때 홍십자병원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5년간 위탁경영을 한 뒤 미국 재림교회 대총회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1918년 상해에 도착했던 김창세는 위장이 좋지 않았던 도산 안창호의 주치의로 그를 보좌하고, 대한적십자회 중심인물로 대원 모집과 부상자 구호활동 등을 전개했고, 후에는 감사로 활동했다. 임시정부가 무장투쟁을 준비하면서 독립전쟁에 참여할 의료인 양성을 위한 대한적십자회 부속 ‘간호원양성소’의 설립과 교수로 활동했다. 간호학생들의 홍십자병원과 시내 각 병원에서 임상실습을 주선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용강군 조사원과 공채모집위원으로도 활약하였으며, 흥사단원(제 121단우)으로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3.1 운동 이후 한국인들은 주로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밀집하기 시작했고 독립운동 기지를 확보해 나갔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도산 안창호를 위시한 민족지도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홍십자병원은 춘원이나 피천득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깊은 인상을 주었고, 특히 춘원 이광수는 김창세의 진실한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홍십자병원의 모습은 이광수나 피천득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김창세는 중국인과 서양인으로부터 ‘신임과 존경’을 받는 뛰어난 외과의로서 병원을 대표하여 1920년 2월 23일 북경에서 열린 의료선교사(medical missionary) 대회에 참가하기도 하고, 병원의 격무에도 불구하고 상해 교포들의 구제활동에도 헌신적이었다. 3년의 수련기간을 마치고 의학발전과 독립의 방법론에 대한 큰 뜻을 위해 미국 유학을 결행했다.
1920년 11월 무일푼 미국에 도착한 김창세는 권서원(勸書員)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준비했다. 상해를 떠날 때 중국재림교회 상해 시조사(시조보관)에서 발행한 『연년익수(延年益壽)』라는 건강서적 500부를 신용으로 받아서 갔다. 특히 출발 전 중국의 유명 정치인이자 외교부장 우팅팡(Wu Tingfang, 伍庭芳, 오정방, 주미 대사 역임) 등의 추천서를 받아서, 캘리포니아를 위시하여 미 대륙을 횡단하며 여러 도시를 방문하고 주로 중국인 세탁소나 식당들을 찾아 권서 활동을 펼쳤다.
록펠러재단의 공중보건 분야의 권위자인 하이저(Dr. Victor Heiser)를 만나 공중보건학이 민족의 건강 회복과 독립의 방책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분야의 권위 있는 존스홉킨스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 보건대학원에 1923년에 입학하여 1925년 2월에 박사학위(PhD, 지도교수 O. S. Rask)를 취득했다. 논문 주제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건강 식생활을 위한 단백질원인 “녹두콩(mung bean)” 관한 연구였다.
유학 중에도 독립운동에 관한 관심은 지대하여 1921년 워싱턴 군축회담인 태평양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계획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하딩(Warren G. Harding, 1921-1923)의 동생을 만나 소개장을 받아 2주 후 워싱턴을 방문하여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라는 서신을 순안의명학교 교사 김봉걸(김창세의 고모부)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일본 경찰에 압수되었다. 국내외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에 대한 요주의 시찰 일제 외무성 등의 문서에는 1920년대 상해에서부터 한국 및 미국에 이르기까지 김창세가 수차 언급되고 있다. 불온통신에 관한 총독부 문서에도 평안남도 순안의명학교와 관련하여 김창세와 하딩 대통령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서, 김창세의 의도를 미리 파악한 일제가 그의 태평양회의 참석 자체를 막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창세는 일제의 한국 침탈과 만행을 폭로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1925년 하와이 범태평양회의에는 참여했다.
1925년 박사학위를 마칠 때 김창세의 수중에는 단돈 4불이 남아있었지만, 유럽의 앞선 공중보건 관련 연구소와 의료기관 및 저명인사를 만나고, 남미(브라질)와 유럽, 발칸반도, 이스라엘과 이집트 등 13개국 공중보건 사업을 살펴볼 목적으로 여행을 떠났다. 대표적으로 1908년 이래 현재까지 9명의 연구소 출신이 노벨 생리학이나 의학상을 받은 파리의 파스퇴르연구소(Pasteur Institute)와 3명의 노벨 수상자가 있는 세균학의 세계적 권위였던 베를린의 코흐 연구소(Koch Institute)를 방문하여 1달간 직접 세균학을 연구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 공중위생에 지옥처럼 암울했던 시대의 의사로서는 선각자적인 시도였다.
출발 전 그는 존스홉킨스대학교 의과대학장이자 보건대학원의 설립자인 저명한 웰치(William H. Welch) 박사와 세계재림교회 대총회장 다니엘스(Arthur G. Daniells) 목사의 추천서를 받아 방문하는 대학이나 병원, 교회의 대접을 받았다. 독일 함부르크에 들러 독일 최대 열대병 연구소(Tropical Institute)와 4,000개의 병상을 가진 유럽 제일의 엡펜돌프(Eppendorf) 병원과 코펜하겐에서 결핵약 사나크로신을 발명했던 묄가(Holger Mollgaard) 교수를 방문했다. 유럽으로 가는 선상에서 스웨덴의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인 구스타프아돌프(Gustaf Adolf, 후에 국왕 Gustaf Adolf VI, 1950-1973, 현 국왕인 Carl 16세 구스타프의 전임 국왕, 경주 서봉총[瑞鳳塚] 명명)를 만나 함께 여행하고, 남미 브라질을 방문한 그의 기사가 신문 1면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5개월여를 여행한 뒤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의학회에 참석하고 1925년 10월 19일 귀국했다. 그의 여행은 단순 관광만이 아닌 선진 유럽의 공중보건과 문물을 관찰하고 지식을 넓히는 과정으로 또한 당대 공중위생에 어두웠던 국민 의식을 일깨우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런 열정으로 그는 귀국 다음 해인 1926년에 「동광(東光)」 잡지 등에 자신의 여행 기행담을 여러 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귀국 후 모교인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의 조교수로 부임하여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며, 공중보건학과 예방의학의 토대를 놓은 데 이바지했다. 질병 예방과 건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강연이나 기고문을 통해 독립을 위해 대중의 의식을 계몽하고자 사자후(獅子吼) 같은 목소리를 높였다. 열악한 위생 수준을 향상하고 공중보건 의식을 증진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민족의 독립이 건강과 직결된다는 육체적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고 의학과 독립운동을 직결시켰다. 또한, 국내에 있던 1925년에서 1927년에는 신간회 지회 설립 및 수양동우회 의사부장으로 활동했다.
1927년 11월 적극적인 공중위생 활동을 펴기 위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중국 상해로 가서 25개 도시에서 건강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며 1928년을 전후하여 프랑스 조계 공동국(公董局) 위생과에도 근무하였다.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결렬로 정세가 혼란하고 중화위생교육회가 해체되자 1929년 후반 자신의 집에서 결핵진료소를 개업하고 나세웅(羅世雄/나창헌[羅昌憲])과 함께 항저우에 결핵요양원도 세웠다. 개업을 계속하면 수지면에서는 괜찮아 보였지만 그의 주 관심사는 개인적 안일보다는 결핵퇴치 같은 공중보건 사업이었다. 이 시기에도 대한인국민회 지부 건설을 위해 도산과 함께 1929년 4월 필리핀을 방문하여 약 3개월간 체류하며 도산을 안내했다. 그리고 다시 1930년 1월 결핵 치료와 관리 및 체계적 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뉴욕을 향해 상해를 떠났다[2].
1930년 대공황의 초입에 미국에 도착한 후, 캘리포니아와 다른 여러 지역의 요양원과 결핵 관련 기관들을 방문하고, 전문가들을 만나 치료와 예방법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또한, 교회들과 클럽들을 방문하고, 항저우 결핵요양원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도 전개했다. 뉴욕시장 지미 워커(Jimmy Walker)의 주선으로 뉴욕의 차이나타운에서 진료소를 개업하고 맨해튼의 위생과장으로, 보이스카우트 건강 책임자로도 일했다. 1931년 6월 만주사변으로 인해 중국인과 조선인이 희생되고, 특히 항저우에 세웠던 결핵요양원이 몰수당했다. 이로 인해 그는 6개월 동안 우울증으로 앓아 누웠다. 설상가상으로 9월에는 일본 군부가 만주를 장악하고 중국을 공격하여 나라 전체를 마비시켰다. 이로 인해 요양원 건립이나 자신의 미국 체류 경비의 주 소득원이었던 강연이나 모금 활동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힘들어지게 되었다.
중국으로 귀국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그는 몇 년을 미국에 더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으로 도산 안창호가 체포되었다. 도산의 체포 비보를 접한 김창세는 즉시 그의 석방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서재필 및 대한인국민회 등과 협력하여 미국 국무부, 상·하원 의원들, 프랑스 대사 등 각계 인사들을 통해 도산의 석방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상해에 있던 가족들을 미국으로 데려 오기 위해 애를 썼지만 성사되지 못해, 심한 우울증과 신체적 장애를 겪게 되었다. 이때 친구 먼셀(Ector Munsell)의 주선으로 존스홉킨스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쿠바의 하바나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경제공황은 계속 악화되었고, 이런 와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폭력과 위협을 받아 거처를 옮기며 살던 그는 1934년 3월 15일 가족들과 몇 친구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뉴욕의 아파트(56 W 55th St)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최후까지 그는 지속적인 폭력과 협박에 시달렸는데, 뉴욕타임스 등 기사는 그 주체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시절 워싱턴군축회의에서 독립을 청원할 목적으로 하딩 대통령을 만나고자 했다가 서신이 일본 경찰에 압수된 것이나, 도산의 체포 후 미국 정계의 정치가와 외교관들을 만나 석방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던 것 등으로 그의 신분이 노출되었고 일제가 여러 해 동안(1920-1934년) 그를 지목하여 추적한 기록들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 일제의 수행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나이 41세, 당대 세계적/세계 시민적(cosmopolitan) 애국지사로서 일생을 견지했던 숭고한 뜻에 따라 최후 일제에 의한 비극적 수모와 마지막보다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열사(烈士)로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3].
이 비극적 사건 이후 상해에 남겨진 그의 부인과 6남매 자녀들은 중국의 공산화로 치닫는 혼란의 와중에서 벼랑 끝 구사일생의 삶을 살았다. 특히 부친의 우국충정에 뒤이어 다섯 아들 중 네 명인 장남 Peter, 셋째 James, 넷째 Richard, 그리고 다섯째 Arthur가 모두 6·25 전쟁에 참전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피땀을 흘렸다. 그들은 각각 한국, 미국, 중국과 베트남에서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사선을 넘나들었다.
김창세는 한국과 중국 및 미국에서 널리 인정받던 의사였지만, 개업의로 사회적 성공이 보장된 평범한 의료인의 길보다는 의술을 통한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살았다.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독립운동 흔적이 역력하지만, 자신이 애국활동을 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겸손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한 세기 전 세균학과 위생학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린 의학계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 절망에 빠진 한반도에서 한국인 최초의 공중보건학 박사로서 거의 짧고도 굵은 삶의 궤적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를 통해 한국 의료계의 뛰어난 자질과 고난 받는 이 민족을 향한 가슴 벅찬 희망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정부는 김창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 8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Notes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References

1. Lee JH. A study on the life and death of Kim Chang Sei, a pioneer in public health in Korea: based on the memoirs found in more than 80 years after death. Korean J Christ Stud 2021;120:69-110.
crossref
2. Park YJ. Chang Sei Kim’s activities on public health in colonial Korea. Korean J Med Hist 2006;15:211-225.

3. Sihn KH. A portrait of the colonial intellectuals: Kim Changsei and the Shanghai cosmopolitan's road. Hist Cult 2012;23:449-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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