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경식 원장: 극빈자들의 아버지, 영등포의 슈바이쳐
Dr. Kyoung Shik Sunwoo: father of homeless, Schweitzer of Yeungdeung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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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식 원장은 1945년 7월 31일 평양에서 아버지 선우영원 베드로 옹과 어머니 손정복 빌리짓다 여사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미국 Kingsbrook Jewish Medical Center Brooklyn N.Y.에서 내과학을 전공했다.
해방동이로 평양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난민수용소에서 생활했던 그는 군인이 되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외삼촌이 전사하자 부모님이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선우 원장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의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의과대학에 다니면서도 모태 신앙에 따른 신념이 그를 방황하게도 만들었다. 실제로 그는 의과대학을 그만두고 성소의 길을 걸어보려고 한동안 고민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런 성품이 1984년부터 ‘작은형제회 재속회’ 회원으로 평신도이면서도 성직자에 준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밑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귀국 후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등을 하면서 주말 무료진료 봉사를 하다가 평소에 마음먹었던 무료 자선 진료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뜻있는 이들과 함께 요셉의원을 설립하고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요셉의원은 노숙자, 행려자, 알코올의존증 환자, 외국인 노동자 등이 찾는 병원이라 늘 퀴퀴한 냄새가 나고 분위기가 어두울 때가 많다. 게다가 가끔씩 술 취한 환자들이 찾아와 소란을 피우고 욕설까지 퍼붓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어디에도 호소할 곳 없는 사람들이 사회에 대한 분노를 이곳에서 터뜨린다고도 할 수 있다. “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어린 아기가 엄마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우는 것과 같은 거예요. 우리가 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저 사람들이 어디 가서 마음을 털어 놓겠어요? 우리가 힘들더라도 참고 받아 주어야 해요.” 생전에 선우원장이 늘 하던 이야기다.
하기는 선우 원장도 처음부터 이 어려운 길을 걸으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난한 환자들을 도와야한다는 단순한 생각 하나로 뛰어든 무료진료 사업.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당시를 되돌아보면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이 무조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 하나로 덤벼들었지요. 하다가 능력이 모자라 문을 닫아도 이 길이 바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었어요.” “좀 모자라서 제 것 못 챙기며 속 썩이는 자식을 가장 염려하고 마음 쓰는 게 부모이듯, 의사인 나는 가장 속 썩이는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모든 의료행위의 ‘꽃봉오리’라고 여긴다. 돌이켜보면 요셉의원 환자들은 내게 선물이나 다름없다. 의사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환자야말로 진정 의사가 필요한 환자가 아닌가?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우 원장이 요셉의원 개원 20주년에 즈음해서 개원 당시를 회고하면서 한 이야기다.
하지만 사전에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고 돈을 미리 준비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어서 순탄한 길이 될 수 없었다. “환자를 살려야 한다. 약해지면 안 된다. 무슨 방법이든지 저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염치불구하고 가까운 동창들이 운영하는 병원에 환자를 떠맡기기도 하고, 대형병원에 찾아가 입원시켜달라고 떼 아닌 떼를 쓰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치료를 소홀히 할 수는 없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차츰 주위에서 도움의 손길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병원은 그래도 멈추지 않고 한걸음씩 앞으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환자들을 20여 년간 돌보면서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을까. 너무 힘들어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차라리 몸이 아프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까지도 해 보곤 했어요. 그 핑계로 좀 쉬어보고 싶었어요.”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힘들다고 푸념을 하면 왜 그 힘든 일을 붙들고 있느냐고 반문을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 때마다 그는 혼자서 “힘들어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나만이 아는 기쁨과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자답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결국은 그 힘든 멍에를 벗고, 그렇게 사랑하던 가난한 이들의 손을 놓고 하느님 품으로 가게 된 것은 하느님이 “이제는 내 품으로 오너라.”하고 배려를 해 주신 것이 아닐까. 2008년 4월 18일 선우경식 원장은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눈을 감고 선종했다. 향년 63세.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장례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고인을 기렸다. “요셉의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원장님은 환자들을 하느님께서 보낸 선물, 보물로 생각했습니다. 고인은 항상 자신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에 맡겨진 불쌍한 사람들의 착한 이웃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 분이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희생과 봉사정신은 이 각박하고 거친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선우 원장님의 뜻이 더 많은 이들을 통해 널리 퍼지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선우 원장님의 평생은 마치 살아있는 성인과도 같았습니다.”
또한 선우 원장의 고등학교 동문인 조창환 시인은 장례미사에서 “어두운 곳에 놓아두어도 촛불은 빛을 발하듯, 말없이 조용히 실천하는 모습을 보고 모여든 수많은 자원봉사자들과 후원자들이 요셉의원을 도왔습니다. 덮고 감추어도 향기는 번져나가듯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말없이 지켜보고 부끄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살아서 행한 가장 큰 일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 더 큰일은 차갑게 얼어붙은 우리의 양심, 어둡고 그늘진 곳에 파묻어둔 우리의 사랑을 일깨워 세상을 따뜻하게 녹여낸 것이었습니다. 국가와 교회, 우리 동네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하지 않을 때 당신이 말없이 뿌린 씨앗 하나가 이제 줄기를 뻗고 가지를 뻗고 잎을 퍼뜨려 크나큰 그늘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라고 그를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