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여성과 아동을 위해 헌신한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김점동(박에스더)
Esther Kim Pak (Chyom Tong Kim), the first woman doctor in Korea, who dedicated her life to neglected women and 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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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5월 26일자 미국의사협회지에 첫 번째 한국인 여성 의사의 탄생을 알리는 뉴스가 실렸다. 김점동(金點童)의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Baltimore Woman’s Medical College) 졸업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주목받는 사건이었다. 여성의 교육이나 전문직 진출이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이를 극복하고 한국 의학의 초석을 다진 김점동은 선구적인 의학자이자 교육자였다.
1877년 3월 16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김점동은 선교사와 일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0살 되던 해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김점동은 깊은 신앙심과 우수한 학업 능력을 보였다. 1890년 이화학당 내에 자리 잡은 여성전문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에 선교의사로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이 부임했다.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로제타를 돕기 위해 김점동과 다른 몇몇 이화학당 학생들이 통역 및 진료 보조를 맡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남녀가 유별하여 여성들이 남성 의사에게 진료 받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서양 의사는 남성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근대적 의료에 더욱 접근하기 어려웠다. 이에 로제타 홀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의료’라는 구호로 한국인 여성 의사를 키우고자 했으며, 학생들을 단순히 보조 인력으로 생각하지 않고 잠재적인 의학도로 보고 생리학과 약물학 등 기초적인 의학교육을 시행했다.
김점동은 뛰어난 영어 실력과 일솜씨로 눈에 띄었지만, 수술에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로제타 홀이 화상 환자에게 자신의 피부를 떼어 이식해 주는 모습과 구순구개열 아동을 수술하여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또한 1891년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스스로 선택하여 새로운 이름을 얻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이로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
1893년 로제타 홀 부부의 소개로 박유산과 결혼한 김점동은 이들과 함께 평양으로 의료선교 사업을 떠났다. 평양 파견 기간 동안, 청일전쟁으로 급증한 환자들을 돌보던 중 로제타 홀의 남편 윌리엄 홀이 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이에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갖기로 했다. 김점동은 미국으로 떠나는 로제타 홀에게 미국에서 의학교육을 받을 수있는 기회를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1984년 12월, 김점동은 로제타 홀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리버티의 공립학교에서 중등교육을 수료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회의 일부 재정적 지원이 있었으나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넉넉지 않았다. 박유산은 로제타 홀의 가족 농장에서 일하며 재정적 지원을 했고, 김점동은 뉴욕시 아동병원에서 일하며 미국에서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동시에 미국 병원에서의 경험을 쌓고 라틴어, 물리학, 수학 등 의과대학 입학을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896년 10월, 김점동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했다.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은 4년제 교육을 제공했으며 임상실습을 포함한 교육과정이 진행되었다. 의과대학 시기는 학업의 어려움뿐 아니라 개인적인 고난이 겹쳤다. 1년차에는 딸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미국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로제타 홀은 다시 의료선교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다. 로제타 홀은 홀로 남을 김점동을 걱정하며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 의사가 있는지 물었지만, 김점동은 “나는 나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할 수 없으며”, “먼저 돌아가 어려운 자매들을 먼저 돌보아 줬으면 좋겠다”며 제안을 거절했다.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3년차에는 남편 박유산이 폐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그녀가 졸업하기 불과 3주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학생활 동안의 수많은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김점동은 우수한 성적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당당히 의사가 되었다.
1900년 11월, 미국에서 활동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김점동은 미국 감리교의 파견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평양 여성전문병원인 광혜여원 선교의사로 부임해 진료를 시작했으며, 1901년에는 서울 보구녀관의 선교의사가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책임의사를 맡게 되었다. 책임을 맡고 있던 1901년부터 1903년 사이, 연 평균 3,0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휴가 기간 이외에는 주 6일 동안 진료했고, 환자들이 문을 두드릴 때는 일요일이나 휴가 기간에도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또한 서울에서 1903년 12월 보구녀관에 설립된 간호학교의 교과과정 개발과 강의에도 참여하였다.
1903년에는 평양으로 자리를 옮겨 로제타 홀과 함께 진료하며, 홀이 세운 시각장애인 학교 운영에도 도움을 주었다. 1904년에서 1905년, 러일전쟁의 여파로 지역상황이 매우 불안정했음에도 이들은 활발히 활동했다. 이 시기 연간 환자수는 4,399명에 달했고 8,638건의 진료를 보았으며 바쁜 날에는 하루 최대 82명까지 진료했다. 또한 병원에 오기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20–30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환자들을 돌보곤 했다.
진료 분야로는 외과와 안과적 질환이 850 사례, 피부과 670 사례, 이비인후과 375 사례, 산부인과 152 사례, 치과 180 사례로 외과적 치료가 많았다. 로제타 홀과 김점동은 다양한 외과적 처치를 수행했는데 홍채절제술이나, 백내장 수술 등 안과적 수술이 많았다. 또한 여성들의 누공 수술도 다수 수행했는데, 불치병으로 여겨져 “이 병(누공)은 한 번도 치료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강에 몸을 던지겠다는 환자를 설득해 치료를 받게 하기도 했다.
김점동은 양쪽 턱관절이 탈구된 환자를 능숙하게 치료하기도 했고, 두창의 후유증으로 콧구멍 안쪽이 폐쇄된 여아에게 수술로 이를 재건해 주는 등 외과적 술기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당시 병원에 방문했던 아동들에서 흔했던 질병은 척추측만증으로 김점동은 석고로 보조기를 만들어 주는 일도 했다. 심한 척추측만증으로 거의 걷지도 못했던 아이들이 치료 후에는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이들은 기쁨을 느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는 위생교육을 제공했고, 병원 밖에서는 평양과 인근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선교 및 교육 사업을 지속했다.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1905년 여름, 폐결핵 초기 증상이 나타나며 김점동은 진료실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수년간 폐결핵으로 투병하면서도 계속해서 오전 진료를 맡아 보거나 수술을 보조하고, 평양 내의 선교활동과 여름 성경학교 등에 꾸준히 참여했다. 1909년 4월 28일, 여성 교육과 계몽의 공로를 인정받아 김점동은 경희궁에서 열린 ‘초대 여자 외국 유학생 환영회’에서 메달을 수여 받았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 의사로 커다란 족적을 남긴 김점동은 많은 사람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와 1910년 4월 13일을 일기로 눈을 감았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넉넉하지 않은 국가에서 태어나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김점동의 이야기는 국내외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로제타 홀에 의해 영문 책자로 만들어져, 근대의학에서 소외된 지역에 여성 의사를 양성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사례로 소개되었다. 서재필, 김익남에 이어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의사 중 한 명이었던 김점동은 최초의 여성 과학자로 인정받아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김점동은 근대 의료에서 소외되어 있던 여성들과 함께하며 한국 의학의 초석을 다진 의사였으며, 사회적 제약을 넘어 여성의 전문직 진출 가능성을 보여준 시대의 선구자였다.
Notes
Conflict of 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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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김점동(박에스더)
약력
1877년 3월 16일 서울 정동 출생
1886년 11월 이화학당 입학
1890년 보구녀관 선교의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의 통역 및 진료 보조
1891년 1월 기독교 세례 후 김에스더로 불림
1893년 박유산과 결혼
1895년 뉴욕 리버티공립학교 입학, 중등교육 수료. 도미 후 남편의 성을 따 박에스더 (Esther Kim Pak)로 불림
1896년 10월–1900년 5월 14일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 졸업
1900년 11월 미감리교 파견 선교사로 귀국, 평양 광혜여원 선교의사 부임
1901–1903년 서울 보구녀관 책임의사 부임
1903–1909년 평양 광혜여원 진료
1910년 4월 13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