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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orean Med Assoc > Volume 64(10); 2021 > Article
한국 최초의 여성 의학전문교육기관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산부인과 의사, 길정희
2019년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등록된 면허 의사 중 26%가 여성 의사이다. 앞으로 그 숫자는 늘어갈 추세이다. 한국에서 근대적 의학교육을 받은 여성 의사는 언제부터 어떻게 양성되었을까? 서양 의학을 받아들인 19세기 말 조선에서는 남녀 간의 접촉을 금했던 내외법의 영향 때문에 여성 의료를 담당할 여성 의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박에스더는 1900년 미국 유학 후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 의사가 되었고, 허영숙은 1918년 일본 유학 후 그 뒤를 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1928년 한국 최초의 여성을 위한 의학교육기관인 조선여자의학강습소가 설립되었다. 이 기관은 1933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재정립되었고, 드디어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경성여의전)가 출범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여성 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노력 뒤에 운산(雲山) 길정희(吉貞姬)가 있었다.
길정희는 1899년 서울에서 1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구한말 정3품 관직을 지냈던 조부 길인수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길정희는 여자도 신학문을 익혀야 한다고 믿은 조부 덕분에 양정소학교와 진명여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조부는 일본 최초의 여자 의과대학인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도쿄여의전)에 이미 몇 명의 한국 여성들이 수학하고 있음을 알고 손녀에게 일본 유학을 권유하였다.
1918년에 도쿄여의전에 입학한 길정희는 재일본도쿄여 자유학생친목회 일원으로 여성 권익 운동과 조선 독립을 위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혈서까지 쓰기도 하였다. 도쿄여의전 재학 중 길정희는 한국 여성 의료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서양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과 처음 만났고, 졸업 후에 한국에 돌아와 여성 의사 양성에 힘쓰자는 홀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1923년 일본에서 경험한 관동대지진 참사는 길정희에게 민족의식과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졸업한 길정희는 조선총독부의원 소아과에서 1년간 수련의 생활을 했다. 1924년부터 동대문여성병원 산부인과와 소아과에서 근무하면서 길정희는 홀과 여성의학교육기관 설립을 의논하였다. 동시에 이곳에서 그녀는 일본식이 아닌 미국식 병원 경영과 의학 기술을 익힐 기회를 얻었다.
길정희는 1924년 김탁원과 결혼하면서 여의학교 설립을 위한 든든한 동반자를 얻었다. 김탁원은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으로 ‘에메틴 주사 중독사건(1927)’을 밝혀낸 한성의사회 회장(1931-1932)을 역임하였고, 다수의 사회운동 조직에서 활동한 민족주의자이자 한국 최초의 정신과 전문의였다. 1928년 5월 김탁원과 길정희의 서소문 개인 병원(1927년 개원)에서 개최된 창립발기회의 결실로 그해 9월 조선여자의학강습소가 문을 열었다. 홀이 소장을, 길정희가 부소장을 맡았던 강습소의 강사진은 모두 한국인 의사들이었다. 이들은 불타는 사명감에서 무급으로 강의하였다. 5명이 산부인과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길정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강습소는 문을 연지 5년 후인 1933년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홀의 정년퇴임 이후 강습소 운영권이 전적으로 길정희 부부에게 넘어왔고, 이것은 곧 미국 감리교의 제반 지원이 중단됨을 의미했다. 서양 선교사의 영향력이 사라진 후 노골화된 일제의 간섭과 강요 때문에 강습소 명칭을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조선’ 대신 ‘경성’으로 변경하여,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칭하였다. 1935년 길정희 부부는 개인 재산을 털어서 창신동 교사와 서소문의 개인 병원을 합쳐서 관철동으로 이전하고, 2층은 교습소로, 1층은 부속병원으로 운영하였다. 이러한 강습소의 재정립은 여성의학교육기관 설립의 사명이 서양 선교사에서 이전되어 길정희 부부를 중심으로 한 한국인 주도의 민족 사업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강습소는 정식 의학전문학교가 아니었기에 매년 총독부에 설립 인가신청을 해야 했고, 졸업생들은 의사검정시험에 응시하여 자격을 획득해야 했다. 이 무렵 총독부가 검정시험을 없앨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강습소를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킬 필요성이 커졌다. 1934년 강습소의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문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해 길정희 부부를 포함하여 재단법인설립위원회 기성회와 여성 의사들을 주축으로 한 교우회가 발족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경계하던 총독부의 방해로 강습소 운영과 전문학교 승격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1938년 우석 김종익 부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일본인 학생을 일정 수준 이상 입학시킨다는 조건으로 강습소와는 별개로 경성여의전 설립 인가를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삼일운동에 참여한 김탁원의 항일 경력 때문에 길정희 부부는 의도적으로 최종 설립과정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경영난에 시달리던 강습소는 해체되어 경성여의전으로 흡수되었다. 길정희 부부는 경성여의전 운영과 교육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밖에 없었지만, 이들 부부의 오랜 헌신 덕분에 민족자본에 의한 여자의학전문학교가 문을 열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들 부부의 두 딸 모두 경성여의전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둘째 딸은 미국 유학 후 경성여의전 후신인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부모들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었다. 1980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는 길정희의 업적을 기려 ‘길정희 장학금’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1939년 김탁원이 별세한 후 길정희는 혼자 산부인과를 운영하면서 여러 부문에서 여성 의료에 기여하였다. 개업 초 횡태위(transverse presentation)로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던 산모를 살린 후 길정희는 여성 의사도 남성 의사만큼 유능하다는 입소문이 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광복 후 길정희는 한국 최초의 여성당인 조선여자국민당(대한여성국민당)에서 위생부장을 역임하였고, 1947년에는 모자보건을 위해 결성된 서울보건부인회에 참여하였다. 한국 전쟁 중 길정희는 부산에서 ‘길산부인과’를 열어 진료 활동을 지속하였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수송동에 개업하였다. 길정희는 1964년 노환으로 병원을 그만두고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967년 향수병으로 미국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귀국했다가, 1979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90년에 별세하였다. 2008년 그녀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남편 김탁원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되었다.
길정희는 ‘나의 자서전’(1981)에서 반세기 넘게 산부인과 의사로 활동하면서 1만 명 이상의 아기를 분만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길정희는 근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진출할 수 있었던 몇 개 안되는 전문직 중 하나였던 의사로서, 박에스더, 허영숙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선구적 여성 의사의 계보를 잇고 있다. 안타깝게도 길정희 부부가 한국 최초의 여성 의학전문학교인 경성여의전의 최종 설립과정과 운영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평생을 산부인과 의사로 살면서 한국 역사의 격동기에 여성의료와 교육에 힘쓴 길정희는 한국 여성 의사 양성 기관의 탄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산파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Notes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Biography

길정희
약력
1899년 서울 낙원동 출생
1907년 양정소학교 진학
1911년 진명여학교 입학
1918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진학
1923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 조선총독부병원 소아과 수련의 근무
1924년 김탁원과 결혼, 동대문부인병원 산부인과와 소아과 근무
1927년 김탁원과 서소문에서 의원 개원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설립 및 부소장 역임, 산부인과학 강의
1933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인계 받은 후 경성여자의학강습소 재정비 및 운영
1934년 교우회와 재단법인설립위원회 기성회 조직 및 참여
1935년 서울 창신동에 있던 강습소와 서소문 개인의원을 관철동으로 이전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
1945년 조선여자국민당(대한여성국민당) 위생부장 역임
1947년 서울보건부인회 결성 참여
1950년 한국전으로 부산 피난 중 ‘길산부인과’ 운영, 서울 수복 후 수송동에서 산부인과 개업
1964년 미국으로 이민
1967년 향수병으로 한국으로 귀국
1979년 미국으로 재이민
1990년 미국에서 별세
2008년 김탁원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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