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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orean Med Assoc > Volume 65(3); 2022 > Article
한국 농촌 보건위생의 거목,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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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은 한국 농촌 보건위생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03년 평안남도 농가에서 태어나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고 평안남도 성천군 별창(別倉) 학교, 경상북도 대구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20대의 청년으로 교원의 길을 걷고 있었으나 습성근막염 투병 경험으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의사라는 직업이 건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생활상의 안정을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그는 전문학교 검정 시험에 합격한 후 1925년 4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수석 입학하였다.
1929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그는 생리학교실 조수로 임명되어 ‘조선인 월경 초기에 대하여’을 비롯한 8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출중한 연구 실력을 보였다. 그러나 집안 형편의 어려움으로 잠시 개업의 길로 들어서 황해도 평산온천에서 공의로 3년 근무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이 곳 산간주민과 같은 적빈(赤貧)은 처음 경험하였다’고 술회할 정도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개업의로서 그는 응당 진료비를 받아야 했으나 주민들로부터 받기 어려운 형편이었던 것이다.
낙담을 거듭하던 그는 공의 생활을 마무리 짓고 다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병리학교실 강사로 부임하였다. 윤일선의 제자로서 1935년 ‘생체에 있어서의 니코틴 작용이 성호르몬에 미치는 영향’을 주논문으로 하여 교토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학자로서의 경력이 꽃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학위를 받기 전 평양고보 은사이자 경성제대 교수 겸학생과장이었던 와타나베 도웅(渡邊洞雲)의 소개를 통해 구마모토 이헤이(熊本利平)의 부탁을 받고 고민에 빠진다. 자신의 농장 무료진료소에 일하면서 농장의 소작인들을 치료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남아 교수로서의 길을 걸을지, 개업의로서 농촌 주민들과 함께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하였다. 농민의 자식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 평산온천에서 겪은 어려움 등을 상기하며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산으로 향하게 된다.
그는 구마모토 농장에서 소작인 3천 가구 전 가족 2만 명을 대상으로 한 큰 진료 사업의 책임자가 되었다. 본장(本場) 1개소와 지장(支場) 4개소의 농장사무소를 순회하였다. 무료 진료였기 때문에 경증 구별 없이 많은 환자들이 몰려왔으며, 휴일에 쉴 수 없을 정도였다. 함께 하는 한국인은 조수 채규병뿐이었다. 구마모토는 약재와 도서, 이영춘의 학회 참여 경비 일체를 회계에서 직접 지불할 뿐 아니라, 진료소 건물을 신축하여 자혜진료소를 설치하는 등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다. 또한 10년이 지나면 농민의 보건위생을 위한 학술 조사 및 연구할 연구소를 설립해 주겠다는 약속을 이영춘에게 하였는데, 이 역시 그의 왕성한 활동의 동기가 되었다.
이영춘은 바쁘게 무료 진료 활동을 하는 동시에 본래 개정에 내려오면서 고민했던 농촌 위생을 위한 근본적인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에 연 1-2차 방문하여 일본학교위생회, 국립공중위생원, 전염병연구소, 도쿄결핵요양소 등을 견학하고 지견을 넓혔다. 1937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한 동양농촌위생회의에 약 2개월 간 참여하며 보건소법을 포함한 농촌 위생에 관한 다양한 의제를 접하였으며 자신만의 농촌 위생에 관한 구상을 다듬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에는 학교 위생에 관심을 두고 초등학교 교의로서 신체검사 등을 수행하였고, 개정국민학교, 대야국민학교, 화호학교 등에 위생실을 설치하였다. 또한 1936년 가뭄이 극심할 때 학교에서 340명의 결식아동에게 급식하는 등 학교 아동 보건에서 선구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진료소 사업이 제법 뼈대를 갖추고 성장하자 이영춘은 당초 약속대로 구마모토에게 조선농촌위생연구소 설립에 관한 제안서를 전달하였다. 제안서는 치료와 예방을 위한 조사사업을 병행하면서 조선농촌위생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관에 대한 구상을 담고 있었다. 구마모토는 전쟁 시기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1943년 자신의 전 재산 중 절반을 사회사업에 기부할 결심을 하고 이영춘과 함께 조선농촌위생연구소를 위한 법인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쟁으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다시 교수직으로 오라는 요청도 있었으나 이영춘은 개정에 남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농촌위생연구소 설립 추진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며, 특히 구마모토 농장이 귀속된 신한공사(新韓公社)를 대상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신한공사의 지원으로 1948년 7월 개정에 농촌위생연구소(農村衛生硏究所)가 공식 설립되었다. 농촌위생연구소는 예방을 위한 조사사업을 담당할 연구부, 진료를 담당할 진료부 등을 갖추었으며, 소진탁(蘇鎭琸), 김중환(金中煥), 윤덕진(尹德鎭), 김경식(金慶湜), 김성환(金聲煥) 등의 젊은 연구원들이 함께 하였다. 또한 농촌의 부족한 의료인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간호사와 조사원, 보건원을 양성할 수 있는 개정고등위생기술원(開井高等衛生技術員養成所)을 설립하였다. 1957년에는 군산 시내에 한옥을 얻어 영유아를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심영아원(一心嬰兒院)을 수립하는 등 사회복지기관 역시 운영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 농촌위생연구소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보건부 자체가 예산이 적었던 데에 사립이라는 이유로 예산 확보가 지체됨에 따라 1959년에는 보조금이 거의 1/10 이하로 삭감되었으며 결국 6개 진료소를 폐쇄해야 했다. 정부의 지원이 거의 중단될 무렵 한미재단의 중재로 미국인 선교의사였던 고든 S. 씨그레이브(Gordon S. Seagrave) 박사 후원 기금을 받으면서 개정병원은 씨그레이브 기념 병원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작 본인은 재단 부채 문제로 운영권을 잃게 된다. 이후 이영춘은 사단법인 기생충박멸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여전히 공중보건의 태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였으나, 농촌위생연구 활동에는 관여하지 않은 채 1980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열악한 식민지 시절부터 농촌 위생에 대한 강한 신념과 열정으로 보건위생의 기틀을 닦은 거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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