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규는 1897년 11월 10일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한학을 배우고, 1912년 강계군 명신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신학교를 1916년 3월 졸업하였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 1기로 입학하게 된다. 그 무렵 우리나라 의사의 수를 추산한다면 의학교와 부속의학 강습소 출신 212명, 세브란스의학교 출신 53명, 일본 등지에 유학하여 의사가 된 10명을 합하면 약 275명이었다.
경성의전을 다니던 그에게 운명을 가르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3.1운동은 조선이라는 봉건사회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도 전에 일본제국주의에 국토와 자유를 강탈당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민족의식과 근대화의 열망을 일깨워준 커다란 사건이었다.
유상규와 같은 해 경성의전에 입학했던 이미륵은 3.1운동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독일로 망명길을 떠났다가 훗날 독일에서 작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미륵은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유상규는 종종 우리에게 시위 과정에서 알아야 할 국기, 전단, 행진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마침내 그는 삼월 초하루 오후 2시에 종로의 파고다 공원에서 거사가 이루어진다는 중요한 소식을 갖고 왔다”라고 유상규가 3.1운동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유상규는 시위가 끝난 뒤에도 동료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정황을 파악하고, 이들에게 음식을 넣어주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일경에 체포된 학생은 경성에서만 171명에 이르렀는데, 의학도가 가장 많았으며, 이중에서도 경성의전 학생이 31명으로 가장 많았다.
나라를 찾는 것이 의학을 배우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열혈 청년 유상규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그는 이후 4년 동안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의 비서로 일하는 한편 임시정부 교통국 조사원으로 일했다. 교통국은 조국의 정세와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가져오는 비밀 통로였기 때문에 신뢰를 확실하게 받지 않으면 맡을 수 없는 자리였다. 그는 안창호가 ‘실력양성론’에 입각해서 민족의 역량을 키우자는 취지로 창설한 흥사단에 1920년 입단한다.
그러나 상하이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으로 교통국이 궤멸되기도 하고, 내분이 심각해서 안창호도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안창호는 자신을 힘껏 도왔던 유상규에게 조선으로 돌아가 의학 공부를 계속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귀국을 바로 하지 않고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 1923년 6월 도착하여 1924년 1월까지 최하층 조선인 노동자들과 동거하면서 토목과, 비누공장 일을 했다고 한다. “도대체 노동자란 말과 소만도 못한 노예이다”라고 기록했던 그는 왜 이러한 노동자 체험을 했을까? 지식인들에 대한 실망이었을지도 모르고, 일본의 실체를 알고자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기층민중의 삶을 몸소 체험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 어느 쪽이든 유상규가 말만 앞세우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며 시대를 살아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도중 1924년 1월 1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체포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수상쩍은 조선인을 일컫는 ‘불령선인(不逞鮮人)’에 대한 검속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2일 만에 석방된 유상규는 1924년 2월 6일, 5년만에 고국에 돌아온다.
그는 학교를 떠난 지 6년만인 1925년 4월 13일 복학하였고, 입학한지 11년만인 1927년 3월 23일 경성의전을 졸업하였고 그 해 이애신과 결혼하였다. 그는 1928년 4월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의 조수로 임명되어 모교에 자리를 잡게 된다. 백인제는 유상규와 경성의전 동급생이었는데, 3.1운동으로 투옥되어 6개월 형을 살았고, 복학하여 졸업한 뒤 경성의전 외과 주임교수로 임명 받는다. 이미 교수가 된 백인제는 유상규를 외과로 이끈 것으로 보인다. 유상규는 1930부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약리학교실에서 오자와(大澤勝) 교수 지도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고 1936년 박사학위 논문 ‘약리학적 입장에서 관찰한 Roentgen선 작용에 관한 일고찰에 취하야’를 작성한다.
그가 학업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흥사단 소속의 모임인 수양동우회에서 활약했는데, 이 단체의 기관지 동광 (東光)의 발행에도 관여하고 기고도 하였다. 그가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 글이 27편 확인되는데, 위생을 포함한 건강을 강조하고, 미신이나 주술을 배격하고, 안락사를 지지하 고, 여성의 독립을 강조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의사단체를 만드는 데도 관여하여 1930년 2월 21일 한국인 의사와 치과의사들로 구성된 조선의사협회의 창립발 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유상규는 이 단체의 간사/서무부장으로 선출되어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조선의사협회는 학술대회를 열기도 하고 조선의보를 창간하게 된다.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되지만, 조선의사협회는 대한의사협회의 전신이고 조선의보는 대한의사협회지의 전신인 셈이다.
그는 대중을 상대로 한 의학강연회의 연사로도 나서는 등 의사로서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연회에서 ‘사회학상으로 본 의학’이라는 주제로 강의하기도 하는 데 건강의 사회경제적 요인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박사 학위 통과를 눈앞에 둔 1936년 7월 18일 그가 39세의 나이에 발가락 세균감염증으로 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임종을 맞아 “나의 신체를 연구 재료로 해부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선의사협회는 조선의보에 영정사진을 게재하고, 조사(弔辭)를 싣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는 사망 이틀 뒤인 1936년 7월 20일 경성의전 교정에서 거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슬픔 속에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죽음 앞에 백인제는 “실로 제 일생에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없으리 만치 놀라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통곡하였다”고 조선일보에 글을 썼으며 훗날 페니실린이 나왔을때 약병을 만지며 “유 군이 이것만 있었으면 거뜬히 치료되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안창호는 1938년 사망하기 직전 “평소에 아들같이 여기던 유상규 군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이에 따라 살아 생전 정신적인 부자(父子)의 정을 나누던 두 사람의 묘는 나란히 조성되었다. 그러나 서울시가 강남에 도산대로와 도산 공원을 만들면서 1973년 안창호의 묘를 도산공원에 이장함으로써 안창호의 유언은 무시되고 말았다. 안창호의 묘를 원래의 위치로 옮기기 힘들다면 유상규의 묘를 도산공원에 옮겨 두 분을 나란히 모시고 기리는 것은 우리의 남은 과제가 아닌가 싶다.
그는 3.1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단순히 의사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 살지 않고, 이 나라를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독립투사로, 사회운동가로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살아갔다. 오늘 우리가 대한의사협회지의 귀한 지면에 그의 인생을 소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