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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orean Med Assoc > Volume 66(1); 2023 > Article
근대 대전의 최초 개업의 김종하 선생을 찾아서

Abstract

Background: Recently, it was revealed that Jong-Ha Kim was the first self-employed Korean physician in Daejeon city of South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owever, little is known about him. In this paper, the author aimed to search for historical records of his activities as the first Korean physician in Daejeon city.
Current Concepts: Kim’s clinic in Daejeon city was called Chung-Ang Clinic. This is all that has ever been confirmed about Jong-Ha Kim. The author has been searching for his medical record for the last year. Kim’s medical records were collected from journal papers on the modern history of Korea,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database, Naver news library archive, official gazette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database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alumni, and a resume of a professor at the Hamhung Medical School. The results are as follows. He was born in Shinchang-ri Hamheung city Hamgyeongnam-do on August 9, 1900. He graduated from the missionary school established by Canadian missionaries and was admitted to Kyungseong (Keijo) Medical School in 1918. It was recently discovered that he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on March 1, 1919. His picture, an old leaflet for his clinic which he had used, and his resume as a professor at the Hamhung Medical School were discovered for the first time.
Discussion and Conclusion: The historical records of Jong-Ha Kim’s life provide insight into the lives of contemporary doctors in modern Korea. During the period of 1900 to 1950, which encompasses his historical records, significant events took place in Korean history, and he actively participated in these events. Despite facing numerous difficulties as a doctor in modern Korea, Jong-Ha Kim made decisions that had a great impact. He was a great doctor who served as a good role model.
김종하(金鐘夏) 선생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2021년 대전에서 개최된 학술대회 ‘대전의 의료와 위생’에서였다. 특히 그곳에서 주목된 점은 그가 조선인으로는 대전에서 최초로 개업한 의사란 사실이었다. 대전의 중도일보는 그 사실을 보도, 소개하기도 하였다[1].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김영수 교수는 그의 논문 ‘근대 의사제도와 대전지역의 의료’에서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의 부설로 신흥도시로 성장한 대전의 의료환경 변화를 연구하였다[2]. 그는 신문자료, ‘조선총독부관보’, ‘일본의적록’ 등 당시 발행된 여러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김종하 선생의 존재를 밝힌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전의 의사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다만 그들과 다른 두 명의 조선인 의사가 등장한다. 김종하(金鐘夏) 선생과 하용철(河龍鐵) 선생이 그들이다.
김종하는 함경남도 출신으로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 7월부터 1927년 12월까지 경상남도 마산 도립의원 외과에서 근무하다가 1928년에 대전에 중앙의원을 개원하였다[2].
지금껏 대전 최초의 한국인 개원의료기관은 2004년 대전시가 발행한 ‘대전시보건의료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1940년 조선총독부 의사고시에 합격한 박선규가 1946년 개원한 ‘박외과’라고 알려져 있었다[1]. 하지만 1928년 김종하 선생이 개원한 ‘중앙의원’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은 그를 뒤바꾸는 새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김종하 선생과 중앙의원에 대하여 밝혀진 자료는 미미하였다.

김종하 선생을 찾아서

2021년 창립 75주년을 맞은 대전시의사회에서는 김종하 선생 관련 자료를 수집 발굴하였다. 검토는 ‘金鐘夏’란 이름 찾아 국내 근대사 연구논문들과, 국사편찬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아카이브, 조선총독부관보,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 졸업생 관련 자료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후술하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입수한 함흥의전 관련 자료를 통해 진행했다.

1. 신문에 소개된 중앙의원

1931년 7월 7일 자 동아일보는 ‘대전의 운명을 좌우할 각계의 중추기관’이란 제목으로 대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 인사들을 소개한다[3]. 대전안내판(大田案內版)이란 기사를 게재하는데 당시 세간의 관심사는 세계를 휩쓴 대공황과 맞물려, 경제난이 화두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에 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중앙의원장 김종하 씨는 함흥태생으로 경성의전을 필업하고 경도제대에서 내과학을 전공한 후 마산도립의원에 취직하다가 의를 수학한 者. 맛당이 그 본의의 인술을 발휘코자 남에 매인몸으로 자기의 이상을 실현키 難 하겟슴으로 단연이 직을 사하고 소화3년(1928년) 1월부터 대전에서 개업케 되면서부터 세민급에서 병마로 신음하거나 생활난으로 치료치 못함을 듯고 볼 때에는 氏는 자진하야 도보로 원근을 불고하고 왕진하야 施藥하는 터 (......)
‘김종하’ 선생과 ‘중앙의원’에 대한 기사는 1928년을 시작으로 1932년에 걸쳐 일간지에 십여 회가 등장하나 1932년 이후 그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2. 3.1운동과 김종하

그의 삶에 대한 추적의 단초는 3.1운동에 참여한 경성의전 학생들에 대한 연구,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의 3.1운동 참여 양상’ [4]과 ‘일제시기 한국의사들의 독립운동’ [5] 등에서 시작되었다. ‘김종하(金鐘夏)’라는 이름이 언급되고 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중등·고등교육기관 348개교에 다닌 30만명의 데이터베이스[6]를 검토하였다. 결과는 경성의전을 졸업한 이 중에서 ‘金鐘夏’가 3.1운동에 참여한 ‘김종하’와 동일하였다. 그는 1918년에 경성의전을 입학하여 1924년에 졸업한 인물이었다. 한편 전북대학교 학내 아카이브 중 한국전쟁 당시 수집된 ‘함흥의전 교원 리력서’을 확인한 결과, 3.1운동에 참여한 ‘金鐘夏’가 대전의 ‘김종하’와 명확히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김종하 선생이 다니던 경성의전 학생들은 3.1운동에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당시 경성의전 학생들은 3월 1일과 3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시위에 참여한다[4].
시위 결과 경성의전에 재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 208명 중 무려 15.4%가 재판에 회부 된다. 그들 중에는 김종하 선생을 비롯하여 백인제, 길영희(제물포고등학교 설립자), 나창 헌(후에 경성의전을 중퇴하고 임정의원으로 독립운동에 투신, 의친왕 망명 작전을 직접 시도한다.) 등이 있었다. 물론 구속을 피해 필명 이미륵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이의경(그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압록강’은 그가 3.1운동으로 망명하며 건넌 압록강의 풍경을 말한다.). 후에 독립투사가 된 한위건, 유상규 등처럼 망명길에 오른 학생들도 있었다.
재판결과 시위를 적극 주도한 4학년 김형기는 징역 1년(실제는 18개월 옥고), 1차 시위에서 독립만세를 선도하는 등 적극 참여한 2학년 이익종은 징역 10월(실제는 14개월 옥고), 학생대표로 주도 모임에 참여한 김탁원, 최경하, 나창헌은 징역 7월(실제는 13개월 옥고), 그 외 김종하를 비롯한 백인제, 길영희 등 27명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또는 3년을 선고받았다(선고를 받을 때까지 8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Figure 1) [7,8].

3. 민적등본

1919년 민적등본에서 그는 1900년 8월 9일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 신창리 84번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Figure 2) [9]. 본관은 김해김씨로 부친의 이름은 김희룡, 모친의 이름은 민정의다. 1남 3녀 중 장남으로 그의 아래로는 윤자, 영자, 석자 세 여동생이 있다.
기록상으로 부친 김희룡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함흥으로부터 경성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자녀 교육을 보낸 것으로 보아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10].
한편 그의 본적지인 함흥 신창리에는 1900년대 초 캐나다 선교사들이 세우고 운영하던 의료기관과 학교가 있었다. 제혜병원과 영생학교가 그것인데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에게 선교뿐 아니라 교육진흥, 민족의식을 고취해 주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김종하 선생을 비롯, 경성의전 학생들의 고향이 평안도와 함경도에 유난히 많았던 이유 역시 일찍이 이들 지역에 자리 잡은 개신교를 통해 지역민들이 서양문물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였으며 특히 높았던 계몽정신과 교육열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4]. 후에 언급될 ‘리역서’에서 김종하 선생도 마침 집 근처에 세워진 영생소학교와 영생고등보통학교를 다녔는데 그도 어쩌면 선교사들을 보고 배우며 의사의 꿈을 키웠으리라.

4. 낙원동 159번지

경성 낙원동 159번지는 그가 경성의전을 다니며 살던 하숙집이다(Figure 3) [7,11]. 그곳은 ‘낙원여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었는데 집주인 ‘이현재’는 이곳에서 여관을 운영했던 것뿐 아니라 하숙생들을 함께 받았던 듯싶다. 3.1운동을 관련하여 기록에 남아 있는 경성의전학생으로는 김종하 외에도 함흥이 고향인 함태홍(2학년), 현창연(이하 1학년), 권두경, 박준, 이재택이 하숙을 하였고 조선약학교 1학년생이던 이용재도 이곳에서 하숙을 하였다. 이들은 함북 성진이 고향인 이용재를 제외하면 모두 함남 함흥이 고향인 학생들이었다. 이들 중 반 수가 넘는 김종하, 함태홍, 현창연, 이용재는 3.1운동으로 구속되어 실형을 살았다[4,8]. 당시 “서울에 일찍 올라와 자리잡은 지식인 층”이 하숙집을 운영하였으며 이들 하숙집에서 고향 후학들이 하숙생활을 하였는데 그들은 “3.1운동 과정에서도 같은 하숙집 학생들은 정세를 토론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의기투합해서 시위에 함께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4].
한편 낙원동 159번지 하숙집은 당시 군중들과 학생들이 대규모로 모였던 파고다공원이 걸어서 3분, 단성사가 2분 걸리는, 지척에 위치한 3.1운동의 중심지였다. 경선의전 1학년 학생들은 상당수가 단성사에 모였다. 학년 대표였던 길영희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군중은 파고다공원으로부터 동서 두 방향으로 나뉘어 시위를 이어갔는데 단성사에서 모였던 1학년생들은 동쪽으로 시위를 진행하는 군중을 따라 만세를 부르며 창덕궁 방향으로 향했다[7,12]. 학생 김종하도 그들과 합류하여 만세운동을 벌여갔다[7].

5. 기타 3.1운동 관련 김종하 선생 자료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는 선생이 서대문수용소에 수감 당시 작성된 ‘보석청구원’ (Figure 4) [13]과 ‘탄원서’ (Figure 5) [14]가 남아 있다. 특히 부친이 서명한 것으로 돼 있는 탄원서는 ‘보석청구원’이나 ‘주소변경계’에서의 필체와 같아 아마도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선생이 부친을 대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종하 선생은 8개월간의 옥고 끝에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된다. 그리고 이듬해 복학, 1924년에 경성의전을 졸업한다.
그가 받은 의사면허번호는 ‘601호’다(Figure 6) [15].

6. 김종하 선생의 사진을 찾아서

‘형설기념’ 사진첩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졸업앨범이다. 1924년 경성의전 졸업생 중 일본인과는 별도로, 조선인 학생 49명만이 따로 만든 앨범인데, 김종하 선생의 사진(Figure 7)이 발굴될 수 있었던 것은 ‘형설기념’에 대한 연구[16]에서 ‘金鐘夏’란 이름이 이 앨범에 등장한다는 것을 확인한 결과였다. ‘
형설기념’은 졸업생인 김상후(金尙厚)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1947년 김상후 선생이 급서하자 미망인 고 정화순 여사가 6.25동란 중에도 소중히 챙겨 피난을 갔을 만큼 애지중지 보관해오다가 물려준 것을 막내아들 김평일 선생이 기탁, 현재는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이 보관 중이다.

7. ‘중앙의원’ 전단지

중도일보 임병안 기자에게 어느 날 연락을 받았다. 김종하 선생의 ‘중앙의원’ 관련 자료가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임 기자는 지난 2021년 9월 19일 중도일보에 ‘일제강점기 대전 첫 개원의사는 누구?’란 기사로 김종하 선생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내용인즉, 기사를 본 독자로부터 자신이 김종하 선생의 ‘중앙의원’ 관련 인쇄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임 기자에게 알려왔다고 했다. 그는 판암동에서 골동품상을 운영하고 있는 수집가 전병근 씨였다. 그를 만나 인쇄물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인쇄물은 가로 18 cm, 세로 17 cm 방형의 습자지 같은 얇은 종이로 된, ‘중앙의원’ 홍보 전단지였다(Figure 8).
전단지 네 면에는 각각 “무료 상담”, “질병위생”, “인생의 행복은 건강”, “질병은 중앙의원”라는 표어가 쓰여 있고, 중앙에는 병원 주소와 의사 성명, 전화번호 “424번”, 그리고 모퉁이에는 “춘계종두”, “매독유무혈액검사 시행”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특히 전단지에서 흥미로운 것은 “춘계종두”라는 문구였다.
일본은 강제병합 후 조선에서 종두의 방법을 2회 접종으로 택했다. 두창이 발생한 경우에는 별도의 임시종두를 한번 더 시행했다. 그러던 것이 1923년 조선종두령을 발령, 나이와 관계없이 의무적으로 1세, 6세, 12세 3회의 종두를 시행했다. 2회 접종으로 조선에서 두창 발병이 잦아들지 않자 보다 강력한 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한다[17]. 접종 시기는 춘추 두 차례에 나눠 시행하였는데 대체로 춘계는 유행이 시작하는 4월 이전, 추계는 10월이었다. 따라서 중앙의원의 “춘계종두”라는 문구는 이 전단지가 4월 이전에 배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물관과 검토한 결과 전단지는 근대 의료광고용으로 대전의 근대사는 물론, 의료사적으로 당시 보건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사료였다. 전단지는 개인적으로 매입하여 기증, 현재 대전시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8. 대전 이후의 행적

대전 이후 김종하 선생의 행적은 1934년에 발행된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에 나타난다(Figure 9) [18]. 그가 함경북도 웅기군 마약중독자치료소의 공의(公醫)가 된 것이다. 공의란 일제가 만든 식민지 정책 일환으로써 대만에서 시작하여 조선에도 정착시킨 “관할구역의 위생 및 의사(醫事)기관이 되어, 구역 내 공중위생 및 의사에 관한 여러 사항을 보조”하는 일종의 공공의사 제도다[19]. 지금으로 말하면 질병청 보건의사나 보건소장, 보건지소장과 같은 공공의료의 역할을 맡아 하는 것인데, 현재와 다른 점은 당시는 공공의사라 해도 그 지역에서 개업을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종하 선생이 왜 대전을 떠나 갑작스럽게 공의가 되었는지, 그것도 조선 땅에서 가장 외진 벽촌의 공의가 된 이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마흔 일곱 살에 작성한 ‘함흥의전 리력서’는 세월이 갈수록 그가 의업을 마산서 시작하여 점점 고향 함흥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9. 함흥의학전문학교 교원 리력서

김종하 선생의 ‘리력서’ (Figure 10) [20]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정보과학의 발달 덕분이었다. 근래에 더욱 진보하여 딥러닝을 가동한다는 최신예의 검색엔진은 세상의 수많은 정보들 중에서 “1940년대 의사 김종하”의 존재를 꼭 짚어 한 논문에서 찾아주었다.
‘북한 함흥의과대학 교수진의 구성, 1946-48’ [21]이 그것이다.
1950년 10월, 함흥에 진격한 미군은 북한 기관들에서 각종 서류들을 노획했다. ‘함흥의학전문학교 교원 리력서’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함흥에 진주한 지 불과 2개월 후,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군은 다시 기약 없는 철수를 해야만 했다. 자료들은 매우 극적으로 수집되었다.
전북대 과학학과 김근배 교수는 지난 2015년, 미국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국립문서보관소를 직접 방문하여 한국전쟁 당시 노획된 자료들에서 ‘함흥의전 교원 리력서’를 발굴하였다. 그리고 자료들을 연구 분석하여 논문 ‘북한 함흥의과대학 교수진의 구성, 1946-48’을 발표하였다.
논문에는 김종하가 당시 함흥의전의 소아과 교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대전의 조선인 의사 김종하”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운이 좋게도 김근배 교수께 연락이 닿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김 교수는 김종하의 ‘함흥의전 리력서’을 대전시의사회에 기꺼이 제공해 주었다.
전송받은 “리력서”를 열어 본 순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대전 중앙의원”이란 글자였다.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온 “리력서”의 주인공은 “대전의 조선인 의사 김종하 선생”이었다. 마지막 퍼즐이 끼워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리력서”는 1947년 4월에 작성되었다.
김종하 선생은 국권이 강탈당한 직후인 1911년 캐나다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던 함흥영생학교에 입학, 지역 최고의 수재들이 다녔던 함흥고보를 졸업한다. 경성의전을 다니던 중에는 전술하였듯 3.1운동 참여로 옥고를 치르고 1924년 의전을 졸업한다. 의사가 된 후엔 경성의전부속병원서 3개월간 의무부수를 하고 마산도립의원(현 도립마산의료원)에서 의원으로서 4년간 근무한다. 이후 대전에서 약 4년간 중앙의원을 직접 운영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력서엔 대전에서 “1929년”부터라 쓰여 있는데 실제는 “1928년”으로 이는 선생의 착오로 의한 듯하다. 1932년에는 함북 웅기에서 동인의원을 운영하지만 이 시기는 웅기마약치료소 공의를 함께 맡아 할 때다. 1942년엔 드디어 고향 함흥으로 돌아와 진해의원을 개업한다. 해방 후엔 일인 의사들이 떠난 함흥의전 부속병원에 소아과 교수로 부임한다. 함흥의전 부속병원은 바로 그가 어릴 적 보았던 캐나다 선교사들이 세운제혜병원의 후신이기도 하다.
논란이 될 수도 있는 점은 그가 1946년 7월 조선로동당에 가입한 사실이다. 실제 그가 맑스주의자였는지, 아니면 당시 교원들은 의무적으로 당원에 가입해야 했던 건지는 “리력서”만으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북한 함흥의과대학 교수진의 구성, 1946-48’에 의하면 46년부터 해마다 이뤄진 함흥의전의 교원 심사에서는 정치사상 강화를 우선으로 여기다 보니 부족한 교수인력난에도 불구 사상미달자는 박사학위 소지자도 학교를 떠나야 했다고 한다. 더구나 해마다 검열은 더욱 까다로워지고 그러다 보니 교원 중 신규 로동당 가입자는 늘었다고 한다. 그 사이 북한에선 “자산가 집단으로서 의사들은 토지개혁을 필두로 중요 산업 국유화, 반대세력 제거, 종교활동 제약 등의 조치로 신분의 위협과 생활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더 직접적으로는 중요 산업 국유화에 편승하여 일어난 개인 병원의 인민병원으로의 전환 움직임은 많은 의사들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북한체제에 협력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았고 그 일부는 서둘러 월남하기도 했다.”고 한다[21]. 1948년 12월 함흥의전에서도 8명의 교수진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명단엔 김종하 선생도 포함하고 있었다.
김근배 교수는 당시 북한 의료계의 대세적 추세에 따라 김종하 선생의 월남을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하지만 보훈처와 대한의사협회에 확인해 본 결과, 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국군 전사자는 물론 북한군 포로명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1948년 이후 김종하 선생의 행적은 더는 찾기지 않았다.

결론

지난 1년간, 대전 최초의 개업의 김종하 선생의 흔적을 찾아왔다. 그로 인해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이 확인되었고 그 사실들은 그의 3.1운동 참여 사실과 근대 개업의로서의 삶을 추측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들을 포함했다. 또한 그의 사진이 발굴되었고 그의 전공도 처음 시작했던 외과와는 달리 소아과였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발견된 함흥의전 이력서는 김종하 선생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근대의사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고 있었다. 1900년 생인 김종하 선생의 “리력서”에는 조국의 패망으로 야기된 얼룩으로 시작해 있었고 3.1운동과 같은 민족의 저항과, 갈라진 이념의 대립 또한 어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반세기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마치 구천을 떠도는 영혼처럼 먼 타국을 떠돌다 마이크로필름 한 장에 겨우 복사되어 귀향한 “리력서”야 말로 한 민족의 비애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여러 번 세상이 뒤바뀌는 시절에 모든 것이 낯설어야 했던 근대의사의 삶은 말 그대로 격랑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런 모짊 속에서 그들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다. 부조리한 시대에 순응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저항하며 살 것인가? 그 가운데 순응하며 안락한 미래를 택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던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물론 김종하 선생은 후자를 택했던 듯싶다.
역사는 참으로 반복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역동적인 의료계의 시대, 우리에게도 종종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순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 과연 무엇이 진정 고귀한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모든 것이 쉽지 않았을 시대, 삶의 하나하나가 처절한 투쟁이었을 위대한 조선인 의사 김종하 선생(1900.8.9.~?)을 기억해 본다.

Acknowledgement

I appreciate Prof. Kim Young Soo at Yonsei University, the staffs of the Institute of Medical History and Culture of Seoul National Universityu Hospital, Professor Kim Geun Bae of Cheonbuk National University, Dr. Kim Pyeong Il, Mr. Lim Byeong An; a journalist of Joongdo-Ilbo, and a collector Mr. Jeon Byeong Geun. Without their help, it was not possible to collect the data of this article.

Notes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Figure 1.
Interrogatory to Jong Ha Kim at May 1, 1919. Sourc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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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
Certificate of residency of Jong Ha Kim issued on July 2, 1919. Sourc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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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
Report of address change. When applying for bail, Jong Ha Kim’s address was changed from Hamhung to 159 Nakwon-dong, Gyengseong (Seoul). Sourc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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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4.
A bail claim document by Jong Ha Kim. Sourc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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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5.
A petition by Jong Ha Kim’s father, 5th page. Although there were name and stamp, the handwriting is the same as Jong Ha Kim’s signature. It is presumed that Dr. Kim, who could write Japanese, wrote it instead of his father. Sourc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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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6.
The official gazette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n which Jong Ha Kim’s medical licensing certificate number was written (1924). Sourc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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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7.
Photo of Jong Ha Kim when he graduated from Keijo Medical School (1924). Source: Institute of Medical History and Culture, Seoul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Photo album was donated by Dr. Pyeong Il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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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8.
A Leaflet for Daejeon Chung-Ang Clinic in 1930s. It was donated to Daejeon Municipal Museum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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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9.
List of officers in public institutes at Hamgyeongbuk-do in the Official Gazette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1934). As a public physician, Jong Ha Kim worked in Ung-gi Care Center for drug addiction. Sourc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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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0.
Resume of Jong Ha Kim as a professor of pediatrics of Hamhung medical school (1947). Sourc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20], provided by Professor Geun Bae Kim, Cheonbuk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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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er Reviewers’ Commentary

이 논문은 대전 최초의 개원의였던 김종하 선생의 행적을 추적하여 기록한 의사학적 논문이다. 김종하 선생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1928년 대전에 최초의 의원인 중앙의원을 개원하였다. 이 논문은 연구논문이나 의학 종설이 아니고 의사학적 성격의 논문이므로 학술 논문에서 사용되는 객관적 기술 방식과는 다르게 주관적으로 기술된 면이 있으나, 의학을 전공하는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선배 의사의 행적을 잘 발굴하여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점에서 의사학적 의미가 있는 연구로 판단된다. 논문의 내용도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어, 향후 유사한 의사학적 연구를 진행하는데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으며, 관련 연구들이 이루어질 때 중요 참고문헌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리: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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