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한국 현대 의학의 개척자이자 선각자

Inje Paik, a pioneer and visionary leader of modern medicine in Korea who practiced Noblesse Obl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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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orean Med Assoc. 2023;66(3):209-215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3 March 10
doi : https://doi.org/10.5124/jkma.2023.66.3.209
Department of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in Medicine, Inje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Busan, Korea
김택중orcid_icon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Corresponding author: Taekjoong Kim E-mail: cenobite@inje.ac.kr
Received 2023 February 16; Accepted 2023 March 14.

백인제는 선각자

선각자(先覺者)란 글자 그대로 남보다 앞서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그러한 점에서 백인제(白麟濟, 1899-?)는 선각자였다. 실제로도 백인제는 “각급 의사 조직과 학회의 결성으로 외과학계의 기초를 다진 선각자”라는 헌사와 함께 2012년 3월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으며, 1999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그의 전기 제목 또한 『선각자 백인제』이다. 이렇듯 백인제를 가리키는 수식어로 흔히 선각자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가 세상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백인제가 그 시대에 비추어 선각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일제강점기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의 주임교수라는 높은 사회적 지위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관립 의학교의 교수로서 당대 보통의 식민지 조선인이라면 꿈도 꾸기 어려웠던 장기간의 해외 연수 기회를 두 차례나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햇수로 3년에 달했던 두 번째 연수(1936-38년)를 통해 그는 유럽과 미국의 현실은 물론이거니와 당대 서구의 의료 현장 역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반인의 해외 이동 수단이라곤 기차나 선박뿐이었고, TV조차 없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연수가 세계사적 통찰력을 제공한 참으로 좋은 기회였을 것임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직후인 1938년 제자들과 나눈 대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우선 그는 일제의 동맹국이었던 독일 제3제국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스를 가리켜 “깡패들의 도당”이고, “독일인의 대부분이 그를 싫어한다”며 맹비난하였다[1]. 일제의 군국주의가 팽창일로였고, 또한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불과 1년 전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식민지의 피지배자 의사이자 관립 의학교 교수로서 보기 드문 식견을 보여 준 셈이다. 이러한 견문 확장의 결과는 자연스럽게 의료 현장으로도 이어졌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대에도 최고의 의료기관이었던 미국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의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 시찰 후 이와 같은 사립의 비영리 의료기관 설립을 필생의 목표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부터 1941년까지 13년 동안 조선인 의사로서는 유일하게 관립 의학교의 외과학교실 주임교수 자리를 지켜냈던 백인제가 1941년 모교인 경성의전을 스스로 사직하고 외과병원을 개원하게 된 것도 제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국제 정세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필연적 결과였다. 특히 수제자였던 성산(聖山) 장기려(張起呂, 1911-1995)는 1981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있었던 회고 좌담회에서 “일제 패망의 징조가 역력하여지니까 숙원이시던 메이요 클리닉 같은 것을 세우기 위한 자원을 얻기 위하여 개업하시게 된 것이라 짐작”된다고 밝힌 바 있다[2]. 해방 바로 이듬해인 1946년 백인제가 한국 최초로 사재(私財)인 자신의 외과병원을 공익법인화하여 ‘재단법인 백병원’을 창립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도규계의 거성, 한국 외과학의 초석을 놓은 삶

무엇보다도 백인제는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다. 1941년 개업을 하자마자 환자들이 몰려왔으며,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저동의 현 서울백병원 자리에 개원한 까닭에 특히 일본인 환자들이 많았다는 수제자 김희규(金熙圭, 1912-2005)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1]. 수술 실력 없는 조선인 외과 개업의에게 환자들, 그것도 일본인들이 몰릴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수제자였던 장기려의 증언 역시 다음과 같이 일치한다.

“(경성의전에서) 내가 모시고 있을 때 받은 인상입니다마는 선생의 수술에 대한 호평과 일반인의 신임도는 여간 두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각종 질환의 감별진단에는 어느 누구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당시의 대수술은 선생님의 독무대 같은 인상을 줄 정도였으며, 한·일인 할 것 없이 서울 장안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심지어 일본이나 만주에서도 환자가 선생님의 수술을 받기 위하여 찾아왔던 것입니다. 위장 특히 위궤양, 위암, 간담관, 유암(乳癌), 갑상선 등의 수술을 받기 위하여 오는 환자들이 많았습니다.”[2].

일찍이 경성의전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부터 획득한 ‘도규계(刀圭界)의 일인자’라든가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라는 명성은 그러나 거저 생긴 것이 아니었다. 경성의전 재학 4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을 만큼 공붓벌레로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일제의 차별이라는 시련 가운데 이어진 각고의 노력이 뒤따랐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으되 그 재능에만 의지하지 않고, 학창 시절 요나 침구를 개는 일조차 별로 없을 만큼 공부에 열중했던 그는 동급생들보다 어린 나이에도 리더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1919년 3·1운동 당시 그가 경성의전 학생 대표로서 활약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3학년이던 백인제는 이 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고 동년 11월 6일이 되어서야 석방되는 고초를 겪었다.

3·1운동 참여는 결국 경성의전 퇴학으로 이어졌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떠나 독립운동을 할 것인지, 의학 공부를 계속해 나갈 것인지 실존적 갈등을 겪던 백인제는 이듬해인 1920년 4월, 우여곡절 끝에 4학년으로 복학할 수 있었다. 이에는 평소 그를 아꼈던 경성의전 일본인 교수들의 도움과 더불어 3·1운동 이후 시행된 일제의 회유 전략인 이른바 문화정치가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차별은 계속되었다. 1921년 전 학년 수석으로 졸업했음에도 3·1운동 참여를 이유로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한 것이다. 대신 경성의전의 부속의원 기능을 했던 조선총독부의원(이하 총독부의원)에서 부수(副手)로 2년간 근무하면 면허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 관립 의학교이던 경성의전의 학생에게는 졸업과 동시에 의사면허가 자동 부여되었으므로 백인제로서는 억울한 처사였을 것이다.

백인제는 신(新)의학의 우월성이 외과학에 있다고 보았던 시절인 만큼 총독부의원 외과에 입국(入局)하였다. 그러나 면허가 없었던 탓에 2년간 대부분의 외과의사가 꺼렸던 마취를 전담하게 되었다. 마취 전문의가 없던 시절의 형 집행 유예에 따른 이러한 차별을 그는 오히려 기회로 활용하였다. 내색하지 않고 성실히 마취기술을 익혔고, 이렇게 해서 습득한 뛰어난 마취기술은 훗날 외과의사로 대성하는 데에 밑거름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1923년 마침내 면허(조선총독부 제537호)를 취득한 백인제는 총독부의원 의원(醫員)에 임명되어 정식 외과의사로 일할 수 있었다. 총독부의원에 재직했던 6년 동안 백인제는 진료 외에도 수준 높은 우수한 연구를 진행하여 의학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특히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일본에까지 그 이름을 알렸으며, 1927년에는 경성의전 외과학교실 강사가 될 수 있었다.

백인제는 결국 상기 논문을 정리하여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전편): 실험적 흰쥐 구루병의 생성 및 그 일반적 제검색」이라는 제목으로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 제출하였고, 1928년 4월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서는 일곱 번째 의학박사였으며,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의학박사로는 세 번째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내내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한 조선인은 단 11명뿐이었고 보면 그 희소성을 인정받을 만한 것이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직후인 1928년 6월 백인제는 마침내 29세의 젊은 나이로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의 주임교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1941년 사직할 때까지 그는 외과의사이자 의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진료, 연구, 교육을 병행하면서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라는 명성을 구축해 나갔다.

한편 백인제는 학교와 부속병원에 안주하지 않고 조선인 사회와 의학계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우선 1930년 조선인 의사들과 치과의사들로만 구성된 최초의 전국 조직이었던 조선의사협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대한의사협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이 조직은 그러나 일제의 군국주의가 날로 심화되던 1939년 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백인제는 이 조직의 창립부터 해산까지 10년간 중추적인 소임을 다하였다. 이보다 앞선 1928년에는 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기성회의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훗날 설립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외과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는 등 여성의 고등교육에 대한 선각자적인 이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외에 백인제는 조선인 민중을 청중으로 한 ‘통속의학강연회’의 연속 개최 및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의학과 질병에 대한 조선인의 의식 수준을 끌어올리고자 부단히 노력한 계몽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에게도 남모를 고충이 있었다. 예과 과정이 없는 의전을 졸업하였던 터라 어학의 계통적인 공부와 수·물리에 대한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3]. 이를 그는 밤늦은 독학과 전공을 뛰어넘는 다양한 분야의 독서로써 만회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교수로서 교실의 많은 문하생을 제대로 지도하고자 함에 그 첫 번째 이유가 있었다. 교실원 지도와 이에 따른 교실의 연구 업적은 식민지 조선 유일의 종합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1926년 개교하였던 까닭에 다른 의미에서도 중요성을 띠었다. 제국대학 외과학교 실과 학문적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자였던 일본인들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갖추었던 백인제의 문하에는 다른 교실과 달리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는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를 성의 있게 지도하였다. 이는 자연히 교실의 활성화로 이어져 백인제의 외과학교실이 마침내 제국대학보다 우세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인 제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임상강의는 매우 인기 있었으며 본인의 임상 경험을 토대로 이론과 실기를 잘 접맥시킨 것이었다. 또한 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각별한 사랑으로써 제자들을 훈련시켜 훌륭한 외과의사들을 양성하였고 질적으로도 우수한 논문들을 지도, 발표하였다. 이렇게 해서 배출된 외과의사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을 합쳐 모두 3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주목할 만한 한국인 제자로는 장기려(張起呂), 이재복(李在馥), 김희규(金熙圭), 그리고 백인제의 경성의전 입학 동기이자 제자였던 독립운동가 유상규(劉相奎, 1897-1936)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 밖의 제자로서 훗날 백인제외과병원에서 백인제와 함께 의료진으로 근무했던 외과의사 주영재(朱永在, 1917-2008)와 윤덕선(尹德善, 1921-1996), 그 외에 내과의사 전종휘(全鍾暉, 1913-2007)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

백인제가 길러낸 이들 후학이 해방 후 외과학의 발전뿐 아니라, 의료를 포함한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 사회에 기여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병마에 시달리던 한국인의 고통을 우수한 의술로써 다스리고, 후진 양성에 헌신하고, 나아가 민중 계몽에도 힘썼던 백인제의 선각자적인 삶이 후학들에게도 투영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후학 가운데 일부는 인제대학교 백병원,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한림대학교 성심병원과 같은 사립의료기관 건립의 중추가 되었다는 점에서 개인병원의 법인화를 통해 진료, 연구, 교육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한국의 메이요 클리닉을 건립하고자 했던 백인제의 꿈이 후학들의 삶 속에 일정 부분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자로서의 삶, 도산 안창호와의 연

백인제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사상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실력양성운동 계열의 민족주의자였다. 일제강점기 그의 행적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그 스스로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며, 실제로도 외과 의사로서 일본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학문과 수술 실력을 갖추는 것으로써 자신의 노선을 입증했다. 또한 앞서도 서술했듯이 실력 있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조선인 민중을 계몽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더욱이 그는 오랜 교분을 쌓았던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와 같은 대표적인 실력양성론자들이 보였던 친일이나 패배주의로 빠져들지도 않았다. 반대로 일제의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 요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조선인 학생들의 학병 출정 권유 강연 요구 등을 전부 의연히 거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단순히 총독부가 설립한 관립 의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하여 도덕적 민족주의의 잣대로 그에게 함부로 ‘친일’의 굴레를 씌우면 안 된다.

백인제가 이광수처럼 변절하지 않았던 데에는 장기간의 해외 연수를 통한 국제적인 균형 감각의 습득이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나, 한편으로는 안창호의 사상적 영향이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백인제와 안창호를 연결하는 고리는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다. 우선 백인제가 졸업한 오산학교가 안창호 주도로 설립된 신민회(新民會)의 영향으로 세워진 민족주의 계열의 학교였다. 백인제의 평생지기이자 백인제가 주치의이기도 했던 이광수는 백인제 재학 중 그의 오산학교 스승이었으며, 이광수 자신이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興士團)의 단원이었다. 또한 백인제의 평생의 신우(信友)이자 교실원이었던 외과의사 유상규는 의사가 되기 이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의 비서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흥사단원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인제 자신이 흥사단원이었다. 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1월 24일 단우번호 1102번으로 흥사단에 정식 입단하였다[4]. 1949년 10월에는 흥사단 고위 간부인 의사부장(議事部長)에 선출되어 1950년 납북되기 전까지 활동하였다. 이뿐 아니라 해방 이전에도 그는 안창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7년 12월 7일 미주 흥사단원 허진업(許眞業)이 김병연에게 보낸 편지 중에 “백(인제) 씨는 저명한 의사로 安島山의 건강을 위하여 많이 걱정하시던 건전한 성격을 가지신 선생입니다. 따라서 도산과 접촉이 깊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5]. 관련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안창호가 고문 후유증과 지병의 악화로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으로 이송되어 치료 중 1938년 서거하였을 때 백인제가 경성의전 교정에서 영결식이 열릴 수 있도록 총독부와 직접 교섭하여 이를 성취시켰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어 덧붙여 둔다[6].

백인제가 생전 안창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은 1946년 11월 그가 재단법인 백병원을 창립하면서 작성한 「재단법인 백병원 설립 취지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안창호의 지론인 ‘무실역행(務實力行)’, 곧 거짓이 아닌 참을 힘쓰고 공론(空論)이 아닌 실제 행하기를 힘쓰자는 주장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인제는 해방 직후 한국이 처한 유례없는 악조건 가운데 “신국가 건설과 신문화 창진(創進)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그는 “문화력(文化力)의 집적이 민족력(民族力)이요 국가력(國家力)임을 확신하고 의학의 부문에서 미력이나마 공헌을 할 결심”으로 사유재산인 자신의 병원을 법인화하여 사회에 환원하였다. 글자 그대로 무실역행한 셈이다.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을 지냈던 제자 전종휘 역시 “지금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강당이나 백병원 회의실에서 볼 수 있는 ‘무실역행’이라는 훈계는 安島山 선생님이 즐겨 쓰셨던 것으로 백인제 교수님이 열렬한 흥사단 단원이었음을 일깨워 준다”라는 증언으로써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7].

백병원의 설립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해방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백인제의 활동은 본업인 의료에만 머무르지 않고 문화, 경제, 정치 등 다방면에서 동시에 진행된 자못 놀라운 것이었다. 이는 「재단법인 백병원 설립 취지서」에서 그가 밝힌 포부대로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힘을 축적하여 신국가 건설과 신문화 창진에 이바지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백인제는 그저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뜻한 바를 몸소 하나씩 실천해 나가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백인제는 문화 운동가로서 1947년 해방 직후 시기의 대표적인 출판사 중 하나였던 수선사(首善社)를 설립하여 납북되기 전까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거의 20권에 달하는 양서(良書)를 출판하였다. 또한 수선서림(首善書林)이라는 서점을 열어 동생인 백붕제(白鵬濟, 1910-?)에게 운영을 맡김으로써 출판 문화 향상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사회 활동가로서 백인제는 백병원의 경영 이외에 조선산업진흥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무역업에 관여하였다.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중구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3위 득표를 하였다. 그 직후인 6월에는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활동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1941년 개원 후 큰 성공을 거둔 그가 형성한 거대한 재력이 있었다. 실제로 재단법인 백병원 창립 당시 그 재산 가치가 원화로 7,500만원, 미화로 25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과 의학의 미래에 관해 원대한 꿈을 꾸었던 백인제는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재단법인화를 통해 자신의 재산을 사회구성원 모두와 나누려는 선각자적 모습을 보인 것이다. 사유재산을 공익법인화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에 해당하는 백병원의 재단법인화는 물론 해방 이후 갑자기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이에는 1941년 개원 전부터 꿈꾸었던 백인제의 개인적인 이상, 곧 메이요 클리닉과 같은 종합병원을 설립하고자 한 열망이 한 축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1946년 11월 설립 취지서와 함께 작성된 재단법인 백병원의 정관을 살펴보면 “본 법인은 의학연구와 의료사업의 향상발달을 목적으로” 하며, 의학연구기관의 설치 및 의학연구에 대한 장학시설 등과 같은 사업을 한다고 돼 있어 백인제가 종합병원을 넘어 교육과 연구도 할 수 있는 대학병원의 건립을 꿈꾸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해방 전후의 열악한 의료 현실에서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을 건립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주의적인 발상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선구적인 의사들은 이러한 발상이 현실화되면 의료의 극심한 상업화를 저지하고 의료의 공공성을 강화시킴으로써 신국가 건설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보았다[8]. 백인제의 행적은 그의 시각 역시 그러했을 것임을 뒷받침해 준다.

한편 해방 정국에서 백인제를 포함한 한국 의사들은 일본인들이 관리하던 의사 조직과 종합병원들을 빠르게 접수해 나갔다. 그리고 백인제는 언제나 그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해방 이틀 뒤인 1945년 8월 17일 개원의 중심의 건국의사회가 발족하자 그는 주요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경성의전과 부속병원의 접수를 책임졌다. 9월 19일 각 의학교 교수 중심의 조선의학연구회가 발족하자 제도분과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건국의사회와 조선의학연구회가 발전적으로 해체 후 통합된 조선의사회가 새로이 발족하자 학술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2월 21일 서울의사회(현 서울특별시의사회)가 발족하자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7년 제2대 회장으로 다시 선출되어 1949년까지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1947년 5월 10일 백인제를 비롯한 각 시도회장 주도하에 유일의 전국 의사 조직인 조선의학협회(현 대한의사협회)가 발족하자 상임이사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조선외과학회(현 대한외과학회)가 발족하자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50년 납북될 때까지 3대를 연임하였다. 또한 모교인 경성의전의 재건과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개교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상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백인제는 해방 정국과 정부 수립 시기에 여러 의사 조직과 학회의 결성 및 운영, 그리고 의과대학의 재건과 개교 등에 훌륭하게 그 소임을 다함으로써 한국 현대 의학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앞서도 서술했듯 그의 활동은 비단 의학계에 머물지 않고 문화 운동가, 사회 활동가, 정치인 등 다방면으로 뻗어나갔다. 이는 백인제가 신국가 건설을 위한 방안을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백인제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한국 사회 초창기의 혼란스러웠던 시절에 사회 지도층이 솔선수범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노력했던 장면 하나를 목도하게 된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요컨대 백인제의 삶이야말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 곧 역행(力行)한 보기 드문 사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었던 사건이 재단법인 백병원의 창립이었다 하겠다. 흔히 ‘인술로써 세상을 구한다’는 의미로 뜻풀이하는 백병원의 창립 정신인 ‘인술제세(仁術濟世)’는 이러한 맥락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분단의 비극을 삶으로 체현

백인제는 제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외과의사답게 배짱이 있고 배포도 남다른 인물이었다. 따라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점령될 위기에 처했을 때 멀리 피신하라는 가족 친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축했다고 한다. 대신 그는 병원에 머물면서 부상병과 일반 환자들을 계속 치료하였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백병원을 접수하자 그제서야 백인제는 흥사단 단원 박현환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어 9월 말 동생 백붕제와 함께 납북되고 말았다. 납북된 이후 백인제의 삶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 없다. 그러나 항설에 따르면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반동으로 낙인찍혀 1955년 전후하여 재판을 받고 숙청당했다 한다.

백인제는 국제 정세에 대한 혜안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9]. 이러한 이유로 정치적 중도 성향을 나타내었으며, 무조건 처음부터 진보적인 정치사상을 배척한 수구적 반공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해방 후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의료계에서조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좌익들을 질타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좌익들 역시 백인제를 백안시하게 되었다. 또한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이 남한의 경제를 교란하고 당의 경비 조달을 목적으로 일으킨 지폐위조 사건인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사건’ 재판 당시 백인제가 피고들의 상처 감정인으로 참여한 것도 좌익의 미움을 사는 실질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재판의 심리 과정에서 고문에 의한 피고들의 허위 자백 여부가 논란거리가 되었는데, 백인제는 안과의사 공병우(公炳禹, 1907-1995)와 함께 고문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감정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따라 고문을 받았다는 피고들의 주장이 재판부로부터 배척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백인제는 해방 초기의 유연성이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우익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백인제가 납북된 데에는 외과의사로서의 이용 가치가 한 이유로 작용했겠지만, 납북 후 북한 정권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은 것이 숙청이라는 비극적 결과로 이어졌다. 북한에서 재판을 받고 숙청당했을 때의 죄목 역시 항설에 따르면 앞서 서술한 조선정판사 사건 재판 때의 고문 여부에 대한 감정 결과 및 5·10 선거 출마였다. 즉, 남한 정부에 협조한 반동적 인사라는 것이었다. 분단과 전쟁의 비극적 산물인 백인제의 납북으로 그의 신국가 건설을 위한 원대한 꿈은 좌초되었다. 당시 한국 의료계에는 그와 같은 규모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 사실상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납북은 백인제 개인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도 크나큰 손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인 백병원은 아들 백낙조(白樂朝, 1934-2000)와 조카 백낙환(白樂晥, 1926-2018), 그리고 장기려와 전종휘 같은 제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 5개의 종합병원을 거느린 백중앙의료원 체제로 발전하였으며, 그 구성원이 한국의 메이요 클리닉으로서 백인제의 꿈을 이루고자 애쓰고 있다.

Notes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References

1. Dr. Paik’s Biographical Publication Committee. A visionary leader, Inje Paik Changbi Publishing Co.; 1999.
2. Cho JS, Chang KR, Joo YJ, Paik NW, Chun CH. Dr. Paik’s retrospective roundtable. Inje Med J 1981;2:229–237.
3. Chung GC. Pioneers of medicine in Korea (I) Tongbang Publishing Co.; 1985.
4. Heungsadan’s 101 People Editorial Board. 101 People of the Heungsadan Young Korean Academy (Heungsadan); 2015.
5.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formation System.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ccessed January 20, 2023. https://search.i815.or.kr/.
6. Paik Hospital’s 70 Years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70 years of Paik Hospita. 1l Inje University Press; 2002.
7. Chun CH. Uichangyahwa Euihak Publishing Co.; 1994.
8. Sihn KH. The medical professionals’ medical conceptions and the development of private hospital before and after liberation: focusing on Korea’s first incorporated foundation, Paik Hospital. Korean J Soc Hist Med Health 2018;1:75–103.
9. Park YJ. Paik Inje’s perception and practice of modernization. Korean J Soc Hist Med Health 2018;2:10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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