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상은 1925년 경성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 재학 도중 아버지 조원환(曺元煥, 1892-1964)이 당대의 ‘만주 붐’을 따라 만주국 다롄으로 이주하면서, 봉천제일중학교(奉天第一中學校)로 학적을 옮겼다. 이후 뤼순의학전문학교(旅順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여 의학에 입문하였으며, 1945년 만주국 패망 직후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공부를 마치기 위해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계승한 서울의학전문학교에 편입했고, 이후 서울의학전문학교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문부로 통합됨에 따라 1948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의의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 이후 조규상은 곧바로 심상황(沈相煌, 1909-1972) 교수가 이끌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위생학교실에 들어갔다. 실험실 연구를 희망했고, 심상황 교수를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위생학교실에는 1941년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김인달(金仁達, 1915-1985)이 먼저 입국한 상황이었다. 김인달이 한국인의 체위(體位)와 주거 환경 등 보건학과 환경위생학의 기본적인 탐구 주제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조규상에게는 당대 한국 의료계의 또 다른 당면 과제였던 기생충, 결핵 등 감염병 문제에 관한 연구가 배당되었다. 조규상은 위생학교실 조교로 일하며, 중앙방역연구소의 연구 과제에 참여했다.
그러나 연구를 시작한 지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한국전쟁(1950-1953)이 발발하면서, 조규상의 연구 경력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규상을 포함한 연구진 전원은 1951년 1.4 후퇴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같은 해 2월 부산에 전시연합대학이 설치되어 강의가 재개되었으나, 생계를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교수 인력조차도 강의료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여 부업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조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규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제14야전병원 예방의무중대에서 의사로 일하다, 조선방직 부속의원 검사과장으로 취직하였다.
조선방직 부속의원에서 조규상은 처음으로 공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마주하였다. 방직기를 계속해서 가동하기 위해 12시간 2교대 근무가 기본이었고, 미성년자가 전체 직원의 절반이 넘었다. 공장 내부도 심각했다. 건조하면 실이 잘 끊어진다는 이유로, 여름에도 습도를 90% 이상으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규상의 관심은 1953년 8월의 환도와 함께 다시 위생학 본령으로 이동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미국 제5공군 사령부로 징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실험실이나 실험 기구는 대부분 파괴되거나 버려졌다. 전임강사로 승진한 조규상에게는 위생학 강의와 연구 기반의 재건이라는 두 가지 과업이 주어졌다. 연구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예방의학교실로 개칭한 위생학교실 재건이 어느 정도 완료된 1954년, 조규상은 미국 유학을 계획했다. 대규모 연수 및 유학 과정인 미네소타 프로젝트(Minnesota Project)의 시행이 발표되었기 때문이었다. 최신 설비가 갖추어진 세계 최강국의 실험실에서, 의학 연구를 선도하던 엘리트 의학자에게 직접 교육받을 기회였다. 그러나 조규상의 계획은 또 한 번 어그러졌다. 유학을 결심한 바로 그해, 공군 소집 영장이 나온 탓이었다. 조규상은 “참으로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곧 새로운 계기가 될 참이었다.
조규상은 소집 후 항공의학연구소(이하 항의연)로 배치되었다. 항의연은 1952년 7월 1일 공군본부 산하에 설치된 기관으로, 주로 비행과 관련한 의학적 문제, 이를테면 고공 저압 상황이나 높은 중력 가속도 상황에서의 신체 변화 등을 연구하던 곳이었다. 항의연의 강점은 다양한 연구 장비였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일부 대학을 제외하면 연구는 생각도 할 수 없던 상황이었지만, 항의연은 아니었다. 항의연에는 미군이 지원한 군원장비(軍援裝備)를 중심으로 국내 유일의 뇌파검사기와 심전도검사기 등 다종다양한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실험의학자를 꿈꾸던 조규상은 이와 같은 항의연의 연구 설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
여러 연구를 진행하던 1955년, 조규상은 대한석탄공사에서 일하던 최영태(崔永泰, 1909-1992)와 만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최영태는 당시 한국의 유일한 산업의학 연구자였다. 본디 조선총독부 페스트 방역반 조선인 대표와 미군정 보건후생부 방역국장 등을 역임한 중진 미생물학자였으나, 1950년 모종의 사건으로 억울하게 방역국장직을 내려놓은 이후 곧바로 대한석탄공사 장성탄광 부속 장성병원 의무실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장성병원에서의 활동도 순조롭지는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연구 기반의 결여였다. 규폐증이 널리 퍼진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탄광 환경을 정확히 측정하고 이것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계량적으로 연구해야 했지만, 장성병원에는 제대로 된 설비와 충분한 인력이 없었다.
인력과 장비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영태는 항의연을 찾았다. 마침 항의연 소장을 맡던 최재위(崔在緯, 1908-1966) 대령 역시 최영태와 마찬가지로 미생물학을 전공한 실험의학자였다. 최영태의 지원 요청을 받은 최재위는 당시 대위로 진급한 조규상을 필두로 한 일군의 연구 장교를 장성탄광으로 파견하였다. 조규상은 이에 더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후배 가운데 산업의학에 뜻이 있던 이승한(李昇漢, 1930-) 등을 연구진에 추가하였다. 이렇게 피난 시절 산업의학과 인연을 맺었던 조규상은 항의연을 거쳐 장성탄광에 파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산업의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조규상은 1958년, 4년의 복무를 마치고 전역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신분을 의미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항의연의 연구 시설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조규상은 오늘날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해당하는 성신대학 의학부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조규상에게 성신대학 의학부는 두 가지 인연이 있던 곳이었다. 하나는 종교적 배경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나고 자란 조규상에게 성신대학은 신앙과 업무를 조화할 수 있던 좋은 선택지였다. 또 하나는 외래 강사 경험이었다. 조규상은 항의연 근무 당시 성신대학 의학부의 예방의학 강의를 맡은 바 있었다.
이러한 두터운 인연을 바탕으로 조규상은 제대 이후 곧바로 성신대학 의학부 조교수로 임용되어, 초대 위생학교실 주임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이 과정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나에게 있어 숙명적인 부르심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위생학교실이 창설된 이후에도, 몇 년간은 제대로 된 연구가 불가능했다. 신설 대학인 까닭에 연구 설비 등이 갖추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연구 설비 문제는 1962년 가톨릭 산업의학연구소가 설립되며 비로소 해결되었다. 서독(西獨) 가톨릭계 재단의 원조를 받아 다양한 연구 기자재를 지원받거나 구입한 결과였다.
연구 여건이 개선되면서, 조규상은 본격적인 산업의학 연구와 산업재해 진료에 나섰다. 시작은 기업 경영진의 설득이었다. 노동 환경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의학의 연구는 기업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조규상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산업 환경 관리의 또 다른 주체인 정부를 설득했다. 마침 1960년대 초반 보건사회부 내에는 개혁적 성향을 지닌 일군의 인물이 존재했다. 초대 노동청장과 보건사회부 장관을 겸임한 정희섭(鄭熙燮, 1920-1987)과 보건사회부 장관의 자문 기구인 사회보장심의위원회(이하 사보심)가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경제성장 우선주의에 대항하여 사회보장 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성과는 적지 않았다. 조규상은 노동 관리의 필요성을 통감하던 정희섭과 논의하여 사업장 순회 진단을 시행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63년 4월 8일부터 같은 해 12월 13일까지 가톨릭대학 의학부 산업의학연구소와 대한결핵협회가 공동으로 1,773개 사업장에 근무하는 148,358명에 대한 건강 진단을 시행하였다. 정부가 주도한 최초의 노동자 건강 진단이었다. 이듬해인 1964년, 조규상은 건강 진단 결과를 가톨릭대학 의학부 산업의학연구소의 기관 학술지인 ‘한국의 산업의학’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협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희섭과 사보심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소수파였고, 나머지는 산업 보건을 포함한 사회보장 제도에 관심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경제발전의 수단 정도로 이해할 뿐이었다. 산업의학을 둘러싼 상황은 점점 악화하였다. 노동자를 향한 탄압은 강도를 높여 갔고, 노동자를 위한 활동 역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보건사회부와 산업의학연구소의 전국 순회 진단은 한 번으로 종결되었다. 산업환경 개선이나 산업재해 치료에 대한 지원 역시 상상할 수 없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산업재해를 방지하고 치료하여 노동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인력 훈련을 통해 노동자를 대규모로 공급하는 데 열중했다. 조규상에게 주어진 또 다른 시련이었다.
정부의 무관심 탓에, 산업의학 연구와 산업재해 치료는 계속해서 민간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이에 따라 대한 산업보건협회의 회장과 부회장을 맡던 최영태와 조규상은 협회 내에 ‘직업병 클리닉’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대한산업보건협회 재정으로는 새로운 병원을 설립할 수 없었고, 1965년 11월 가톨릭중앙의료원이 명동 성모병원 본관 1층에 클리닉을 대신 개설하였다. 한국 최초로 직업병 전문 기관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시 클리닉에 설치된 병상은 20개뿐으로, 전국의 환자를 담당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직업병 클리닉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조규상은 본격적인 치료 기관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1966년 여름 조규상이 새로운 산업재해 전문 병원의 계획을 수립하였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서울대교구 부주교 김창석(金昌錫, 1926-1993) 신부를 비롯하여 의무원장 윤덕선(尹德善, 1921- 1996) 교수, 그리고 독일 유학 경험이 있던 안용팔(安容八, 1926-1990) 교수 등이 서독 미제레오 재단을 방문하였다. 이미 산업의학연구소에 적지 않은 금액을 지원했던 미제레오 재단은 이번에도 30만 마르크를 약속했다.
미제레오 재단의 지원 이후, 산업재해병원의 설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1967년 12월 기공식이 거행되었고, 4년이 지난 1971년 11월 정식으로 산업재해병원이 개원하였다. 규모는 200병상으로 기존에 설치된 직업병 클리닉의 10배에 해당했다. 여기에 일본 해외기술협력사업단(Overseas Technical Cooperation Agency, OTCA)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연구와 진료 기반이 더욱더 확장되었다. 조규상은 기존의 산업의학연구소와 산업재해병원을 관리하는 상위 기구인 산업의학센터를 설치하고, 초대 센터장으로 취임하였다.
조규상은 산업재해병원의 개원을 준비하는 동시에, 대한산업보건협회의 부회장으로서 전국에 설치될 근로자복지의원의 개원 준비와 운영을 총괄하기도 했다. 근로자복지의원은 전태일(全泰壹, 1948-1970)의 희생을 계기로 설치된 기관이었다.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폐렴에 걸린 동료 여공이 치료를 받기는 커녕 오히려 해고되는 모습을 목도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요구하며 목숨을 버렸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노동 운동이 격화할 조짐을 보이자, 노동청은 영세 사업장 노동자를 위한 무료 진료사업을 먼저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1972년 2월 청계천 평화상가에 노동청이 출자하고 대한산업보건협회가 운영하는 근로자복지의원이 개원하였고, 이후 영등포, 인천, 대전 등에 같은 기관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200병상의 산업재해병원조차도 전국의 진폐증 환자를 모두 감당할 수는 없었다. 1978년 대한석탄공사 장성병원에 진폐치료센터가 추가 설치되어, 진폐증 환자를 분산한 이유였다. 근로자복지의원의 상황은 더욱더 좋지 않았다. 예산과 장비, 인력 모두가 부족했고, “겉치레 개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후 국립노동과학연구소(1977), 근로복지공사(1977), 산업안전보건법(1981), 진폐예방법(1984), 한국산업안전공단(1992) 등이 신설되고 제정되었음에도, 현실은 여전히 열악했다. 계속해서 발생한 수많은 산업재해는 산업보건의 문제가 여전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조규상의 삶이 보여주는 의미는 훼손되지 않는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설립된 산업의학연구소와 산업재해병원, 근로자복지의원은 산업의학 연구와 진료의 굳건한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노동 환경과 노동자 건강에 무관심했던 때로는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당대의 상황에서, 이들 기관이 설치되고 운영되는 데에는 조규상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조규상은 이렇게 척박한 환경 속에, 소외 당하던 노동자의 질병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조규상은 여든넷이 되던 2008년, 지난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 공군에 소집되었을 때는 공부를 중단한다는 억울함이 있었으나, 어디에서나 노력하면 길은 있는 법이다. 아니 역경 속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가 꿈꾸던 실험실 의학자의 삶은 갑작스러운 영장 소집 앞에서 어그러졌다. 서른을 앞둔 젊은 의학도는 아마도 큰 좌절감을 느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을 딛고 일어나, 노동자 건강을 위해 일평생을 헌신하였다. 사회를 위한 의사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조규상의 자취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