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문학의 태동을 돌아본다
A look back at the beginnings of the medical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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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쯤 필자는 피부과학 교수로 서울 소재한 의과대학에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에 앞서 강의실에 자리한 본과 3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고등학생 시절, 연극이나 음악을 즐기기 위해, 연주회나 연극 공연장을 찾아가 본 적이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였다. 일견, 손을 든 학생의 숫자는 재석(在席) 학생의 30%에 미치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다른 의대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으면, 같은 질문을 던지곤 하였으나, 매번 그 수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참담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필자가 고등학생 시절인 1950년대 중반, 옛 ‘시공관(市公館, 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인 김동원(金東園, 1916-2006)씨가 주연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햄릿(Hamlet)’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1955년쯤의 국내 경제 여건은 오늘에 비하면 참혹하리만큼 열악하였다. 그런데도 필자는 학교에서 연극을 찾아가 보라는 ‘종용’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인문학이 품고 있는 예혼(藝魂)과의 만남을 교시(敎示)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수 학생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의과대학생이 ‘인문학’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작금의 사실이 많은 의대생이 ‘공부하는 기계’ 또는 속칭 ‘공붓벌레’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닌지 무거운 마음으로 묻게 된다.
1990년,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부임하면서, 필자는 신생 의과대학을 이끌어 가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면서, 국내외 의과대학의 장단점을 비교 및 검토하여야만 하였다. 그 과정에서, 의과대학 교육과정을 ‘예과 2년, 본과 4년’의 고정 시스템의 틀을 통합 ‘6년제’로 일원화하면서 각 학과 간의 연계성과 유연성을 높였다. 그 한 예가 법의학 강의였다. 3학년(본과 1학년)에 배정하였던 법의학 시간을 임상 실습 과정 직전인 고학년에 배정하였다. 그런 가운데 교육과정의 첫 2년 중 의대생이 방학 기간에 국내 중·소형 병원에서 실습하도록 하였다. 모든 ‘병원 실습생’은 배속 지정된 병원에서 ‘선배 의사’의 지도를 받기보다는 간호부서에 속해 간호사가 수행하는 업무를 함께 수행하도록 하였다. 즉 실습생의 ‘교육 공간’은 병원 내 의사의 ‘상주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며칠 후 들려온 실습생의 고충 보고에 의하면, 의사 선배들이 “왜 망신스럽게, 의대생이 간호부서에 속해 실습하느냐?”고 나무랐다고 한다. 그때, 필자는 “의대생의 병원 실습 정신은 바로 그 편견을 넘어야 하며, 간호 업무는 물론 입원환자의 배식 업무도 동참할 것”을 권하였다. 그 결과 병원 실습을 마친 의대 초년생의 호응도는 생각보다 높았다. 몇몇 학생은 스스로 병원 실습 기간을 연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의예과 학생들의 병원 실습 과정은 지속되지 못했다.
그와 함께 의대의 교육과정이 타 인문 사회계열 대학에 비하면 너무 과중한 측면도 있어, 의대생이 인문학에 접근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제한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문학을 의대 학생 생활권에 끌어오는 방안을 검토하게 되었다. 즉 국내 극작가로 저명한 윤대성(尹大星, 1939-) 교수를 의대 강의 시간에 초빙하여, 연극 또는 드라마가 우리 생활 문화에서 가지는 인문학적 의미를 논하는 자리를 마련하였고, 윤용이(尹容二, 1947-) 교수, 이태호(李泰浩, 1948-) 교수, 유홍준(兪弘濬, 1949-) 교수 등을 초빙하여 우리 의대생이 역사에 스며 있는 다양한 문화에 접근하도록 하였다. 그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아울러 1994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우리 의대생과 단체로 방문하면서, 현대미술에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해외 미술관(일본)도 단체로 찾아가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교육의 결과를 구체적으로 인지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인문학 강의’가 보여준 결과는 의외로 성과가 높았다. 그 첫째가, 박물관, 미술관, 또는 음악회는 “저 먼 곳에 있는 ‘어떤 것’으로 알았는데, 자기 옆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오는 제자들의 메일을 드물지 않게 받는 기쁨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수년 전 아주대 의대에서 겪은 일화이다. 한 원로 교수의 고희(古稀)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제자들이 삼삼오오 필자에게 와서 인사차 하는 말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강의실에서 배운 피부과학 지식은 잊었는데, 문화 관련 가르침은 기억합니다.”라 하였다. 보람에서 오는 기쁨이 오늘도 생생하다. 그래서 “문화는 뇌리에 박힌다.”라고 하였나 보다. 특히 직업 특성상 의사는 남녀노소(男女老少), 첫울음을 터트리는 태아에서부터 숨을 거두는 망자(亡者)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사로서 본분을 다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의과대학 교육 과정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의료인문학’을 국내 각 의과대학 교육과정에 반영하는 데에는 故 김용일(金勇一, 1935-2019) 교수의 역할이 컸다.
언제인가 의대 교육과정에서의 ‘인문학’을 강조하는 필자의 칼럼이 모 일간지에서 언급된 것을 김용일 교수가 접하고는 필자를 만난 자리에서 세심한 관심을 보였다. 그 후, 필자와 의기투합하여 ‘(사) 한국의학교육학회’가 중심이 되어 국내 의과대학이 일정 주기로 평가받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첫 의과대학 평가는 2000년에 시행되었다.
초기에는 신생 의과대학은 물론 기존 의대에서도 ‘의료인 문학교실(Department of Medical Humanity)’ 기준 요건을 갖추는 데 능동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이었다. 교수진 확보 및 일정 규모의 공간 마련이 대학 운영자에게는 재정적 부담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끝으로 위에서 언급한 ‘의료인문학’이 순수하게 국내에서 발아(發芽)된 순수 ‘토종(土種)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필자가 교육계에 몸담으며 거둔 성과 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이다. 세계 어느 의과대학 교육과정에서도 ‘의료인문학’이 필수 학과로 운영하고 있다고 들어본 적이 없어서이다. 의대 교육에 몸담으며 의료인문학의 태동기를 경험한 필자로서, 의학과 인문학에 대한 소회를 이야기하다 보니, 최근 사회 발전에 따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슈에 대한 언급이 부족함을 느낀다. 태동기부터 발달시켜 온 가치에 더하여 앞으로 의학, 문화, 윤리, 사회의 교차점에서 사회 구조와 가치가 건강과 의료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대한 인식과 탐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기를 희망한다.
Notes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