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흉부외과학 개척자이자 교육행정가 고병간

The educational administrator and the pioneer of general thoracic surgery in Korea, Pyung-Kan K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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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orean Med Assoc. 2025;68(3):193-195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5 March 10
doi : https://doi.org/10.5124/jkma.2025.68.3.193
1Department of Medical Humanities and Medical Education,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Daegu, Korea
2Department of Biochemistry and Cell Biolog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Daegu, Korea
최은경,1orcid_icon, 권태환2orcid_icon
1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인문·의학교육학교실
2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세포생물학교실
Corresponding author: Eun Kyung Choi E-mail: qchoiek@gmail.com
Received 2025 January 17; Accepted 2025 February 5.

임상 교육 연구 모두를 아우르는 외과의로 자리잡다

고병간(高秉幹)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용산동에서 1899년 1월 24일 태어났다[1]. 호는 영서(瀛西)이다. 고승헌 씨의 장남으로서 당시 기독교 신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던 집안에서 자라났다. 기독교계 학교인 사립 신영학교에 1908년 입학, 1915년 3월 졸업 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가 운영하던 신성중학교(선천읍 소재)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1919년 3.1 독립운동을 맞아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1년 반 복역해야 했다. 1921년 졸업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3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해부학 교실과 산부인과학교실에서 2년 반 근무하였다. 이 시기 세브란스병원 외과 교수 알프레드 러들로(Alfred Ludlow) 교수 밑에서 일반외과 수련 역시 받았다. 1927년 8월 함경남도 함흥의 기독교계 제혜병원의 외과과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제혜병원은 캐나다 선교여의사 플로렌스 머레이(Florence Murray) 주도로 결핵환자 치료에 주력하고 있었다. 당시 수술은 결핵 완치를 위한 최선의 치료법이었고, 고병간은 외과과장으로서 결핵 치료를 위한 외과술을 많이 습득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플로렌스 머레이의 회상에 따르면 고병간은 일반외과, 머레이는 산부인과를 담당하며 어려운 수술을 상호 보조하였으며, 머레이는 흉곽성형술을 시행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2]. 이러한 머레이의 노력과 결핵환자를 진료한 경험에 고병간 역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머레이가 안식년을 다녀온 후 1935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외과학교실로 연구를 위해 도일하였다. 그는 교토제국대학 외과학교실 도리가타 료조(鳥潟隆三) 교수 밑에서 수학하였으며 연구한 성과로 1940년 2월 ‘고환에서 항체 생산’이란 주제로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해방 후 독보적 교육행정가로 발돋움하다

1937년 4월 오긍선(吳兢善) 교장의 권유로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 외과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전쟁 시기 인력난이 심화되던 상황에서 교육과 병원 진료, 행정의 업무를 도맡아 수행하였다. 1945년 해방이 찾아오자 미군정에서 고등교육 및 의학교육 심의위원으로 활약하였고, 그 해 10월 16일 대구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대구의학전문학교는 일본인 교수가 철수한 이후 학교를 인계받은 한국인 교수들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고병간이 새로이 학교장으로 부임하면서 11월 23일 기점으로 전문부 4년제 학교로 공식 개강하였다. 도립대구의원은 대구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이 되었으며, 고병간은 부속병원장도 겸임하였다. 대구의학전문학교는 1946년 대구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고병간은 유능한 의사이자 연구자, 교육자였으나 대구의전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구의전 동문과의 불화와 갈등도 피할 수 없었다. 이념갈등 역시 극심했던 시기였고, 1946년 10월 대구 항쟁 사건 등 교내외의 크고 작은 투쟁과 동맹휴학 속에서 그 역시 고민이 깊었으나, 그의 지도 하에 대구의과대학(1952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은 국립 의학교육기관으로서 안착하기 시작하였다.

교육행정가로서의 업적은 독보적이었다. 그는 1949년 대한적십자사 경북지부장에 선임되었으며, 경북대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경북대학교는 1951년 4월 고병간을 중심으로 사범대학장 손계술, 농과대학장 김인식, 대구대학장 이규원 등 4개 단과대학 학장들이 발기하여 국립종합대학교 설립을 위한 위원회와 위원을 구성하고 설립을 추진 중이었다. 그 해 9월 그는 문교부 차관에 취임하고 대구의과대학 학장직을 사임하였다. 문교부 차관으로서 그는 1953년 제정된 국립대학교 설치령 공포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1952년 국립종합대학으로 정식 인가받아 창설된 경북대학교 초대 총장을 맡았다. 그가 작사한 교가는 아직도 경북대학교 교가로 불리우고 있다. 국립종합대학교의 기틀을 잡는 데에 소임을 다하였으나 1960년 4.19 혁명으로 사임하였다. 같은 해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 이듬해 9월까지 재직하였다. 총장 사임 후 세브란스병원장이 되어 병원발전과 학생지도에 헌신하였다. 1964년 5월에는 숭실대학 학장으로 자리를 옮겨 종합대학교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국 흉부외과학 개척자가 되다

또한 그는 1947년 9월 포르투갈에서 개최된 국제암종학회에서 한국대표로 참석한 뒤 귀국길에 윤일선과 함께 의학 교육을 6개월간 시찰하였고 미국 흉부외과계의 눈부신 발전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귀국 후 국내에 흉부외과 술기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그는 1948년 10월 6일 마산국립결핵 요양소에서 세브란스의전 출신 유승화(劉承華)를 조수로 하여 한국 최초로 폐결핵 흉곽성형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듬해 5월 5일 대구의과대학병원(현 경북대학교병원) 수술실에서 최초의 폐절제술을 성공하였고 식도-위 문합수술 역시 성공하였다. 같은 해 6월 7일에는 한국 최초로 전폐 절제술을 기도삽관 전신마취 없이 국소 마취 하에 성공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 한국외과학회에 결핵환자에 대한 흉곽성형술 15예가 고병간 교수에 의해 성공적으로 집도된 것으로 보고되었다[3]. 기도삽관 전신마취 없이 개흉과 폐절제술에 성공한 최초 사례들로 당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지도 하에 세브란스 의과대학 유승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이성행(李聖行) 등이 흉부외과 기초를 닦기 시작하였으며, 국내 의료계의 흉부외과 창설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1955년 제2대 대한결핵협회장에 취임하는 한편, 결핵퇴치사업과 흉부외과 창설의 공로로 인정받아 1954년 보건사회부 장관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1966년 뇌일혈로 사망하기까지 그는 현대 대학교육에서 혁혁한 공을 쌓은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가 별세한 이듬해 그를 기념하는 흉상이 개교기념일에 경북대학교 대학본부 교정에 설치되어 빛나는 업적을 기리고 있다.

Notes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References

1. Koh PK. Dr. Koh Pyung Kan’s anthology of sixtieth birthda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1960. p. 11.
2. Murray FJ. At the foot of dragon hill. Duranno; 2009. p. 217.
3. Korean Society for Thoracic and Cardiovascular Surgery. 2015 Thoracic and cardiovascular surgery. Korean Society for Thoracic and Cardiovascular Surgery; 2015. p. 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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