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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orean Med Assoc > Volume 68(9); 2025 > Article
한국 혈액학의 개척자, 황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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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淸虛) 황기석(黃基錫)은 1924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나 1940년 목포상업전수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강원도 태백의 석탄광산에서 경리로 일하며, 그는 잦은 재해와 고단한 삶에 시달리는 탄광촌 주민들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들의 어려움을 목격하며 황기석은 사람들을 위하는 보다 의미 있는 일을 찾고자 했고, 의사의 길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주경야독으로 조선총독부가 시행하는 의학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였고, 2년간의 노력 끝에 1944년 봄 대구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48년 대구의과대학(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경북대학교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친 뒤 1949년 7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조교로 임용되며 본격적인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1].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군의관으로 참전하여 야전사단 의무대에 근무하였으며, 당시 미군 군의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해박한 의학 지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54년 예편 직후, 황기석은 선진 의학을 배우고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의 베이스테이트 메디컬 센터(Baystate Medical Center)에서 인턴을, 뉴욕 마운트 시나이 병원(Mt. Sinai Hospital of Mt. Sinai School of Medicine)과 롱아일랜드 메디컬 센터(Long Island Jewish–Hillside Medical Center of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Stony Brook)에서 내과학을 수련했으며, 혈액학의 대가 루이스 왓서먼(Louis Wasserman) 교수의 지도 아래 임상혈액학(clinical hematology)을 세부 전공했다. 당시는 미국에서 임상혈액학 분야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때였다. 1958년 4월 뉴저지에서 미국임상혈액학회가 창설되었으며[2], 황기석을 지도했던 왓서먼 교수는 그러한 흐름의 주축이 되었던 임상혈액학의 거장이었다. 그 영향 속에서 황기석은 혈액질환 치료를 위한 골수이식부터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치료, 임상수혈학 및 혈액은행 운영 등 첨단 의학 지식을 광범위하게 수학했다[3].
1958년 귀국한 그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혈액학이 아직 독립된 전문 분야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었고, 주요 혈액질환에 대한 연구 기반도 미비했다. 그는 임상혈액학을 미국에서 수학하고 온 당대의 유일한 인물로서, 다양한 혈액질환에 대한 연구와 진료, 혈액 관리체계 구축에 매진했다.
당시 의료 현장에서의 혈액 수급과 관리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1955년, 급기야 국립혈액원에서 매혈한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여러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체계적 혈액 수급 및 관리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어 1958년 2월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이 개소하였다. 같은 해 4월, 황기석은 당시 경북대학교에 파견되어 있던 스위스의료단 단장 조지 메용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혈액은행을 개설하고 혈액 공급 및 수혈 시스템의 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황기석은 척박한 연구환경 속에서도 당시 혈액질환의 새로운 치료법으로 각광받던 골수이식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4]. 1961년, 국내 최초로 동물에서 동종 골수이식을 시행하는 실험을 수행했으며, 해당 성취를 인정받아 같은 해 제6회 경상북도문화상 학술상을 수상하였다[5].
여러 혈액학 질환들 중, 그는 특히 명확한 치료법이 확립되지 않았던 재생불량성 빈혈에 주목했다. 재생불량성 빈혈은 1950–1970년대 동아시아에서 특히 높은 발병률을 보였으나, 국내에서는 그 원인이나 유병률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수혈과 강한 스테로이드 치료 외에는 뚜렷한 치료법이 없던 당시의 어려운 의료 여건 속에서도 많은 환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집중하였다. 경북대학교병원 진료실에는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찾아왔고, 그는 진료와 더불어 발생 사례와 치료 및 예후를 체계적인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들은 이후 국내 임상혈액학 진료 지침이 수립되고 연구가 촉진되는 기반이 되었다[1].
보다 정확한 재생불량성 빈혈의 유병률 파악을 위해 그는 국내 여러 병원들과 협력하여 1966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전국 재생불량성 빈혈 환자 수를 집계하였다. 1차 조사에서는 349예, 2차 조사에서는 494예가 확인되었고[6], 두 차례 모두 황기석이 일하던 경북대학교병원이 가장 많은 사례를 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는 1976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1차 재생불량성 빈혈 국제심포지엄[7] 및 1979년 국제혈액학회 아시아태평양 분회 제4차 대회에서 발표되었으며[8], 미국 혈액학 교과서에 재생불량성 빈혈의 세계적 사례 분포 자료로도 인용되었다. 아울러 그는 진단과 치료에 그치지 않고, 혈액질환의 환경적·역학적 원인에 대한 문제의식도 발전시켰다. 그는 장티푸스와 같은 감염병이나, 농약 성분인 파라티온(parathion) 같은 환경 오염 물질이 혈액질환의 발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하였다[9].
한편 황기석은 한국의 핵의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61년 4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방사성 동위원소실을 개소하여 핵의학 실험을 시작하였으며[10], 1962년 이를 동위원소과로 승격시켜 갑상샘 질환과 혈액질환 진료에 핵의학적 치료 기법을 접목했다. 1963년에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장학금을 받고[11] 미국 UC 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의 핵의학 연구기관인 도너연구소(Donner Laboratory)에서 1년간 핵의학 연수를 받았고, 그 연구 성과를 한국인 최초로 미국핵의학회 학술지(Journal of Nuclear Medicine)에 출판했다[12]. 1964년도에 귀국하여서는 국내 최초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핵의학교실을 신설하고 의과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핵의학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1980년부터 1989년까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교실 주임 및 부속병원 핵의학과장을 역임하였다.
황기석은 진료와 연구 활동을 넘어, 의학 교육과 학술 공동체의 발전에도 헌신하였다. 그는 정년퇴임 전까지 총 152편의 논문을 집필 및 지도하였으며[13], 20명의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했다. 국내 학회의 제도적 기반을 다지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여, 그는 1958년 대한혈액학회 창립에 참여한 뒤 1974–1975년 제9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1986년에는 대한혈액학회 대구·경북지회를 창설하여 초대 및 제2대 회장을 맡았다. 대한핵의학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1962년 창립 당시 부회장을, 1981년부터 2년간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에는 대한내과학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94년에는 대한민국 과학한림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89년 8월 경북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뒤, 황기석은 1990년 개교한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의 내과 석좌교수로 부임하여 1997년까지 혈액질환 강의와 연구를 지속하였다. 1997년, 황기석은 마지막 학기 강의를 마친 후 건강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고, 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학자로서 평생 근무했던 경북대학교병원에서 그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의 공적은 사후에도 높이 평가되었다. 2018년 3월, 대한의학회는 그를 한국 혈액학과 핵의학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로 평가하며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였으며, 2022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그를 제18회 안행대상 학술연구 부문의 수상자로 선정했다. 황기석은 혈액학 및 핵의학 분야의 임상, 연구, 교육, 제도 정립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기여를 남긴 인물로 기억된다. 수많은 혈액질환 환자들을 진료하고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으며, 한국 혈액학과 핵의학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는 후학들이 학문에 대한 동경과 열정을 지닌 참된 학자로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정년퇴임식 고별강연에서 남긴 말, “교수가 하루 허송하면 이 나라 학계가 하루 후퇴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는, 오늘날의 후학들에게도 여전히 깊은 경종을 울린다.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Funding

None.

Data Availability

Not applicable.

References

1. Department of Internal Medicin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A history of the Department of Internal Medicine [Kyungpook daehakgyo uigwadaehak naegwahak gyosil-sa].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2018.

2. Coller BS. Blood at 70: its roots in the history of hematology and its birth. Blood 2015;126:2548–2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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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The centennial history of th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Vol. 1 [Kyungpook daehakgyo uigwa daehak baeknyeonsa 1gwon].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2023.

11. Chosunilbo. The door to nuclear research opens wide: scholarships awarded to 15 Korean scholars [Hwaljjak yeollin wonjaryeok yeongu ui mun: uri hakja 15myeong-e janghakgeum]. Chosunilbo;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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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Cheongheo Whang Kee Suk Gyosu Songsu Ginyeom Nonmunjip Pyeonjip Wiwonhoe. Commemorative essays in honor of Professor Whang Kee Suk [Cheongheo Whang Kee Suk gyosu songsu ginyeom nonmunjip]. Cheongheo Whang Kee Suk Gyosu Songsu Ginyeom Nonmunjip;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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