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의 자(字)는 원일(元一)이고, 호는 대암(大岩)이다. 이태준은 1883년 11월 23일에 경상남도 함안 군북면 명관리에서 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안위지와 사이에 두 딸을 낳았으나 부인은 이태준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사망하여 그의 두 딸은 동생이 맡아 길렀다. 이태준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한성(서울)으로 오기 전에는 근처에 위치한 산너머의 기독교 교회에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태준은 24세인 1907년 10월 1일에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하였고, 약 3년 9개월만인 1911년 6월 21일에 졸업하였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태준은 세브란스의학교 재학시절 안창호(1878-1938) 의 추천으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자매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였다. 이태준은 1909년 10월 만주 하르빈에서 안중근 사건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세브란스에 입원하게 된 안창호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에 국권을 상실한 한국의 선진적 애국지사들은 이민족의 청조를 타도한 신해혁명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다. 이태준 역시 중국혁명에 위생대로 참여하기 위하여 중국망명을 계획하였다. 중국혁명에 참여함으로써 후일 중국혁명가들로부터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태준이 망명을 단행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총독부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반일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이었다.
이태준은 친구이자 선생이기도 한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인 김필순(1878-1919)과 함께 중국망명을 결심했다. 당초에는 김필순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위기에 처해 있어서 먼저 국내를 탈출하고, 이태준은 좀 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 후에 결행하기로 하였다. 서울역에서 김필순을 배웅하고 병원으로 돌아온 이태준은 깜짝 놀랐다. 자신과 김필순이 중국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이미 병원 내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이태준은 황급히 평양행 열차를 타고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태준은 국내 탈출 후 중국 남경으로 향했다. 이태준은 가까스로 중국인 기독교도의 도움으로 기독회의원 의사로 취직하였다. 1912년 중반에 이르러 이태준은 중국의 혁명정당 인물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중국혁명세력에 소속된 학생군(學生軍)에 가담하고 있던 한인유학생들과도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1914년 무렵, 이태준은 김규식의 권유로 남경을 떠나 몽골의 고륜(庫倫, 현재의 울란바토르)으로 갔다. 당시 김규식은 몽골지방에 비밀군관학교 설립 계획을 갖고 있었다. 김규식과 이태준의 몽골 행에는 후일 한인 비행사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서왈보라는 애국청년이 동행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한국의 지하조직에서 약속한 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포기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1914년 가을, 김규식은 서양인 상사들에게 피혁을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고, 이태준은 몽골 정착을 결심하고 고륜에 동의의국(同義醫局) 병원을 개업했다.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이름에서 그의 애국적 항일의식을 엿볼 수 있다.
라마교의 영향으로 병에 걸리면 기도나 드리고 주문이나 외우고 미신적인 치료법밖에 모르고 있었던 몽골인들 가운데서 근대적 의술을 익힌 이태준의 성가는 매우 높았다. 이태준은 몽골왕궁에 출입하게 되었고 몽골 활불, 즉 보그드 칸 (Bogd Khan)의 어의가 되는 등 몽골왕족들의 두터운 신임을 확보하게 되었다. '까우리(高麗)의사' 이태준은 고륜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몽골인들의 이태준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커서 '신인(神人)'이나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을 대하듯 했다고 한다. 한편, 이태준은 당시 몽골에 주둔하고 있었던 중국군 사령관 세 명 가운데 하나인 가오 시린(Gao Silin)의 주치의로도 활약했다.
1919년 7월 몽골국왕인 보그드 칸은 이태준에게 국가훈장을 수여하였다. 이 국가훈장은 '귀중한 금강석'이란 뜻을 가진 '에르데니-인 오치르'라는 명칭의 훈장으로서 제3등 제1급에 해당하는 등급의 훈장으로 당시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이었다.
의술을 베풀면서 몽골사회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은 이태준은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주요한 비밀 항일활동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특히 장가구(張家口)에 십전의원(十全醫院)을 개업하고 있던 김현국(1916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 형제와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장가구와 고륜 사이를 오고 가는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을 비롯한 온갖 편의를 제공하였다. 또한 이태준은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도 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태준은 이 상해임시정부의 군의관 감무(監務)로도 활약했다.
이태준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가 위원장인 한인사회당의 주도로 소비에트정부로부터 확보한 이른바 코민테른 자금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 운송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이태준은 당시 한인사회당 연락을 담당한 비밀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인사회당 코민테른 파견대표 박진순과 상해임정 특사 한형권이 소비에트정부가 지급한 40만 루블에 해당하는 금괴를 시베리아횡단철도를 거쳐 베르흐네 우진스크(Verkhne-Udinsk)까지 무사히 운송하였다. 40만 루블은 다시 두 경로로 나누어 상해까지 운반하기로 하였는데, 이 가운데 고륜에서 북경까지의 험난한 코스의 운송을 책임졌던 이가 이태준과 조응순 등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들이었다.
이태준의 항일활동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의열단(義烈團)의 활동을 지원한 사실이다. 이태준은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을 만났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당시 김원봉 등 의열단 단원들은 생명을 건 거사가 질이 좋지 않은 폭탄이 불발하게 되어 성과없이 아까운 애국청년들의 생명만을 잃고 마는 등 손실이 커 우수한 폭탄제조자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이태준은 김원봉에게 우수한 폭탄제조기술자인 '마쟈르'가 의열단을 기꺼이 도울 것이라며 그를 데려오기로 약속하고 고륜으로 돌아갔다.
'마쟈르'는 고륜에 체류하고 있던 포로출신의 헝가리인으로 자동차 운전수로서 이태준의 활동을 돕고 있었다. 박태원은 '약산과 의열단'에서 고륜으로 돌아간 이태준이 러시아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Ungern Sternberg) 부대에 잡혀 피살된 후 마쟈르가 홀로 북경으로 와서 김원봉을 찾게 되는 감동적인 과정을 매우 극적인 필치로 서술하여 놓았다. 마침내 마쟈르의 도움으로 의열단은 질이 우수한 각종 폭탄을 성공적으로 제조하여 한층 효과적인 대적 테러파괴공작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쟈르는 의열단의 폭탄운반에도 참여하였으며 그의 도움으로 제조된 폭탄들은 미수로 끝난 황옥경부 사건, 김시현 사건을 비롯한 의열단의 파괴공작에 활용되는 것이다.
이태준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 것은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군대가 고륜을 점령한 2월 이후의 어느 때이다.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미친 남작' 운게른은 세묘노프(Grigory Semyonov, 1890-1946) 휘하의 지휘관이었다. 운게른부대는 몽골국왕 보고드 칸과 봉건귀족들의 협력을 받아 1921년 2월 3일 고륜을 점령하고 있던 중국군벌을 분쇄하였다. 중국군대는 2월 3일 아침 고륜이 함락되자 전원 퇴각을 시작하였다. 운게른군대는 2월 4일 중국군이 철수한 고륜을 완전 점령하였다. 고륜을 점령한 운게른군대는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러시아인, 부리야트인을 강제로 병졸로 편입시켰다. 뿐만 아니라 운게른군대는 대대적인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운게른군대의 고륜공격에는 일본인 의용병 43명과 조선인 7명이 참가하였다. 이들 일본인들은 중국은행의 약탈에도 참가하였다. 이태준의 병원 역시 백위파 군대에 의하여 약탈되었다.
이태준은 운게른군대가 고륜을 점령한 직후에 자행한 무자비한 약탈수색으로부터 4만 루블의 금괴를 보호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이태준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소개할 폭탄제조기술자 마쟈르와 함께 4만 루블의 금화를 갖고 북경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태준은 고륜의 운게른 도당으로부터 시달된 체포명령에 따라 고륜으로 압송되어 총살되고 말았다. 아울러 운송하던 4만 루블 상당의 금화도 탈취되고 말았다.
이태준이 운게른의 고륜점령 이후에도 고륜을 떠나지 않은 것은 자기에게 부과된 두 가지 혁명임무, 즉 모스크바 자금 4만 루블의 운송 책임, 그리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마쟈르를 소개하기로 한 약속을 완수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결국 몽골인들에게 근대의술을 베풀며 존경받던 이태준은 자신의 애국적 항일활동, 특히 모스크바자금의 운송 등 친볼쉐비키적 활동으로 인하여 이국땅 몽골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불과 38세였다. 그 해 가을 고륜을 방문한 몽양 여운형은 이태준의 묘를 찾았고, 1936년 '중앙' 5월호에 기고한 여행기에서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조선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기특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고 추모했다.
2001년 이태준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공원이 연세대학교와 몽골정부의 합작으로 몽골 울란바토르에 건립되었다. 이태준의 삶은 국경과 인종을 넘은 국제주의자의 모습 그 자체이며, 한몽 친선의 상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