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2025년 현재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은 필수의료 보장에 필요한 의사 증원 문제로 촉발된 갈등을 극복하고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큰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시야를 넓혀보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보건의료시스템 전반을 진단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모색해야 한다는 더 큰 과제가 눈에 들어온다. 기후 변화는 토지와 생태계에 변화를 일으켜, 인류의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U.S. Global Change Research Program [1]은 기후 변화가 온열 질환, 심혈관계 및 호흡기 질환, 매개체 변화로 인한 감염병, 정신질환 등 인간의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했다. 세계보건기구[2]는 기후 위기를 가장 큰 건강 위협으로 지적하며, 의료계가 앞장 서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의료시스템의 기반을 공중보건(public health)에서 지구건강(planetary health)로 전환해야 한다는 선언도 나왔다[3]. 그리고 Joint Commission International [4]은 병원 및 의료센터 인증 표준 8판의 ‘글로벌 보건 영향(Global Health Impact)’ 장에 지속가능한 의료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이처럼 기후 변화, 자원 고갈, 새로운 팬데믹의 위협 속에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보건의료시스템에서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핵심 화두가 되었다[5].
산업혁명 이후 진보 신념을 토대로 한 생산과 소비 방식이 확산되어 인류의 삶에 여러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자연환경에 미친 악영향을 고려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고[6], 보건의료 영역에 대해서도 동일한 반성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의료시스템에 대한 논의는 건강 수준 향상과 형평성 개선, 그리고 이를 위한 전달체계 개편을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고[8,9], 첨단 기술로 질병을 정복하고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한 연구개발과 보건산업 육성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붓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10].
2023년 말 정부가 필수의료 붕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과대학 정원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그 동안 활용해 온 논의 프레임의 연장선에서 추가 자원 투입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시도의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의료 인력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어서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의료계 내부에서는 의사 수 증원이 아닌 의료 전달체계 개선과 수가 인상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는 정원 확대는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비판이 강력하게 제기됐다. 필수의료 및 지역의료 공백 해소를 위해 의사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주장과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대한 반발로 요약되는 이 갈등은 표면적으로 의사 수라는 숫자의 문제로 여겨지지만, 바탕에는 의료 행위의 본질, 전문가의 자율성, 그리고 국가의 역할에 대한 해묵은 관점의 차이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의 의료 개혁은 문제의 인식과 해결방법의 도출에 새로운 시각을 도입해야 한다. 이에 이번 연구는 현재의 개혁 과제를 필수의료와 의료전달체계 재정립이라는 기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인류세 시대에 걸맞은 지속가능한 의료시스템 구축’이라는 과제로 확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이 연구는 문헌 고찰 방법에 의존하였다. 주로 참고한 문헌은 미국에서 환자 안전을 목표로 전공의 근무시간을 규제하려는 시도에 대한 의사들의 대응을 민속학적 방법을 활용하여 분석한 Kellogg [11]의 연구,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는 현장을 인류학적으로 성찰하여 돌봄의 논리를 제시한 Mol [12]의 연구, 자원의 한계 속에서 적절한 의료공급 수준에 대한 공감대 형성의 필요성을 제안한 Callahan [13]의 연구, 인류세 시대에 적절한 보건의료 모델로 제시된 지구행성의료 모델(planetary care framework)을 제시한 연구들이다. Kellogg [11]의 연구는 의사를 대상으로 한 개혁의 과정이 왜 실패하는지를 보여주고, Mol [12]의 연구와 Callahan [13]의 연구는 보건의료시스템의 개혁이 다루는 의료서비스의 본질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지구행성의료 모델은 보건의료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변화시켜야 할 대상과 요소가 무엇인지를 제시해준다. 이들 렌즈를 통해 현재의 상태를 진단하고, 지속가능한 의료시스템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이번 연구의 목적이다.
의료 개혁의 성공 조건: 의료 현장에 대한 이해와 조율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시스템을 개혁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다. 건강보험의 통합과 의약분업은 매우 큰 갈등을 겪은 후에 비로소 현재의 모습으로 정착될 수 있었고, 의료기관 간 전달체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여러 차례의 시도는 의도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얼마 전 갑작스럽게 시도된 의대 정원 확대 시도는 혼란만을 야기한 후에 좌절되고 말았다. 법률이나 의료와 같이 전문가의 재량적 판단을 특징으로 갖는 영역에 대해서 외부에서 개혁하려는 시도가 관련된 전문 영역의 특성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추진되는 경우 그런 개혁시도는 전문가 집단의 강한 반발을 초래한다[14].
그렇다면 이런 영역의 개혁은 어떤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것일까? 의료 전문가를 대상으로 하는 개혁이 기술적이고 합리적인 설계만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으며, 그 조직의 문화와 정체성, 그리고 구성원들의 행동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통찰을 제공해준 연구가 있다[11]. 이 연구는 미국 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의 주 80시간 근무시간 제한 규정을 도입하는 과정을 심층 분석한 것으로 정부와 경영진이 하향식으로 밀어붙이는 관료적 및 관리적 논리가 현장 의사들이 중시하는 환자 치료와 의료 전문가의 수련이라는 전문가적 논리와 충돌할 때 개혁이 어떻게 교착 상태에 빠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 연구의 대상인 사례의 내용과 과정을 고찰하여 의료 영역의 성공적 개혁을 위해 고려해야 할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개혁의 내용: 외과 레지던트 근무시간 제한
미국 졸업 후 의학교육인증위원회(Accreditation Council for Graduate Medical Education)는 수련의의 과도한 업무로 인한 의료 과실을 줄이고, 환자의 안전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2003년에 주 80시간 근무제를 도입하고자 했다. 명백히 긍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개혁에 현장의 의료인들은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확인하기 위해서 Kellogg [11]는 2년 반 동안 3개의 각기 다른 병원 수술실에서 전공의 및 전문의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일상을 관찰했다. 이를 통해서 공식적인 문서나 통계 데이터만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의료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 비공식적 관행, 그리고 저항의 복잡한 동기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연구 대상이 된 세 병원 중 두 곳은 사실상 개혁에 실패했으며, 오직 한 곳만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거나 타협안을 도출하는 데 그쳤다(Table 1).
사인 아웃(sign out)이라는 업무 인계 관행이 개혁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적인 요소로 밝혀졌다. 야간 당직 전공의에게 환자 정보를 전달하는 절차로 활용된 사인 아웃은 단순한 정보 전달 방법이 아니라 의료의 실천과 교육에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중요한 관행이었다. 사인 아웃을 통해 환자에 대한 책임감이 공유되고, 치료의 연속성이 보장되며, 선배가 후배에게 임상적 지식과 판단력을 전수하는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 80시간 근무 규정은 이 중요한 사인 아웃 관행의 연속성을 단절시켰다. 이제 전공의들은 환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대신에 교대 근무자처럼 환자의 특정 시간대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전공의들이 환자를 부분적으로만 알게 만들어 치료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또한, 선후배 간의 비공식적이고 심도 있는 교육 기회가 줄어들어 장기적으로 외과 수련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개혁에 대한 저항은 근무시간 기록에서 드러났다. 많은 전공의들은 공식적으로는 80시간 규정을 준수하는 것처럼 근무 기록 서류를 작성했지만, 실제로는 병원에 훨씬 더 오래 남아 비공식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밤 10시까지 병원에 남아 일상적인 업무를 마친 다음 날 새벽 4시에 다시 출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80시간 근무 개혁안은 수술실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업무 요구와, 유능한 외과의사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절대적인 시간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현장의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는 개혁에 대한 의료진의 복잡하고 양가적인 태도를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 준다. 전공의들은 살인적인 업무량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근무시간 단축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충분한 수술 경험과 임상 훈련을 받지 못해 실력 있는 외과의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깊은 불안감을 표출했다. 장시간 노동은 고통인 동시에, 최고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으로 내면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문의들도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환자 안전 증진이라는 개혁의 대의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이 겪었던 혹독한 수련 과정이 최고의 외과의를 만드는 유일하고 올바른 길이라는 강한 신념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 80시간 근무 규정이 외과의사의 헌신과 책임감, 강인함을 약화시키는 나약한 조치라고 비판하며, 개혁이 가져올 장기적인 결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개혁에 대한 저항의 이유
80시간 근무 제한은 관료적 합리성과 환자 안전이라는 논리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술실 내부에는 이미 전문가 논리(professionalism)와 도제식 교육이라는 강력한 내부 논리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근무시간 제한에 대한 저항은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합리성 논리가 충돌하는 과정이었다. 외과의들에게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지극히 합리적이며, 오히려 외부 규제야말로 현장의 복잡성을 무시하는 비합리적인 개입으로 받아들여졌다.
현장 의료인들의 저항은 오래된 신념과 역할, 그리고 권위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나타난 것이었다. 첫째는 외과의사의 정체성에 관한 신념체계가 작용했다. 외과에는 ‘더 많이, 더 오래 일할수록 더 나은 외과의가 된다’는 강력한 신념 체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신념은 단순한 믿음을 넘어, 외과의사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통과 의례였다. 수면 부족과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며 수술실을 지키는 행위는 기술적 완벽성과 강인한 의지, 그리고 환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증명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이 혹독한 수련 과정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고통을 공유하고 극복하는 동료 집단 내에서 강한 유대감과 직업적 자부심을 형성하는 사회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주 80시간 근무 제한은 단순히 노동 시간을 줄이는 행정적 조치가 아니라, 외과의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간을 흔드는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이 규정은 덜 훈련되고, 덜 헌신적인 외과의를 양산할 것이라는 깊은 우려를 낳았다. 따라서 개혁에 대한 저항은 자신들의 직업적 정체성과 전문성의 핵심 가치를 지키려는 행위로 정당화되었다.
둘째는 전공의의 이중적 지위와 관련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전공의는 교육 받는 동시에 병원의 필수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개혁 이전의 전통적인 도제식 시스템에서는 고된 노동을 통한 학습이라는 형태로 두 역할이 통합되어 있었다. 전공의는 밤샘 수술에 참여하고 수많은 환자를 돌보는 노동을 통해 외과 기술과 임상적 판단력을 학습하는 존재였다. 이처럼 전공의에게 노동과 교육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근무시간 제한 시도는 노동 시간을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이 통합된 역할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노동 시간의 단축은 곧 학습 기회의 박탈을 의미했다. 전공의들은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사로서의 책임과, 충분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피교육자로서의 권리 사이에서 심각한 역할 갈등을 경험했다. 병원에 더 남아 환자를 돌보고 수술을 배우고 싶지만, 규정 때문에 퇴근해야 하는 상황은 그들의 직업적 양심과 성장의 욕구를 동시에 좌절시켰다.
셋째, 이들의 저항은 의료 전문직의 자율성을 침해했다는 인식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의료 전문직은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된 높은 수준의 자율성을 누려왔다. 의학 지식의 전문성과 복잡성은 의사 집단이 스스로 기준을 설정하고, 동료를 교육하며, 내부적으로 규율을 유지하는 권위를 부여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외부 기관이 일방적으로 수련 과정의 핵심적인 부분인 근무시간을 규제하는 것은 전문직의 자율성과 고유한 지식 체계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받아들여졌다.
전문의(스승)가 전공의(제자)를 교육하고 평가하는 위계질서 아래서, 의료 지식과 기술은 수직적으로 전수되고 전문의는 전공의의 성장과 환자 치료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질 뿐 아니라 책임도 진다. 그런데 근무시간 규제는 이 전통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전문의의 교육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전문의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아닌 외부 규정에 따라 전공의를 퇴근시켜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그들의 역할과 권위를 훼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소결
전문가를 대상으로 하는 개혁에서는 하향식 관료적 논리와 현장의 전문가적 논리가 충돌하며 관할권 분쟁을 발생시키곤 한다. 이런 조건에서 성공적인 개혁은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이해당사자가 모두 참여하여 현장에 맞는 모델을 만들어내는 협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절차적 정의와 사회적 기술 모두가 중요하다.
2024년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발표는 현장의 복잡성을 고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관료적 논리의 하향식 명령이었다. 이에 대한 의료계의 집단 반발을 밥그릇 싸움으로 매도하는 것은 개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의사 양성과 수련 과정, 의료의 질 유지라는 전문가적 관할권이 침해당한 것에 대한 강력한 저항으로 해석해야 개혁을 추진이 시작될 수 있다. 지난 의정사태 당시 양측은 각자의 논리만을 내세울 뿐, 의료 현장의 현실에 맞는 중간적, 협력적 대안을 모색하는 협상 테이블 자체를 만들지 못했다. 그 결과 갈등은 악화되고 신뢰를 파괴하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말았다. 이제 바람직한 개혁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개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려고 한다.
의료 개혁의 방향 모색
큰 위기를 겪고 수습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지금의 시기는 매우 결정적인 시점이다. 이번에 지향하는 개혁은 우리 보건의료시스템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합의하고, 힘을 모은 가운데 추진되어야 한다. 새로운 보건의료시스템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다음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환자 선택의 존중과 돌봄
현재 의료는 환자를 존중하고 환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제공하는 방향을 지향해왔다. 그런데 Mol [12]은 현대 의료가 강조하는 환자 선택이라는 이상이 좋은 돌봄과 거의 관련이 없고, 환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의료의 질을 개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좋은 돌봄에 필수적인 사유와 실천 방식을 훼손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현대 의료에서 환자의 선택이라는 개념이 강력하게 제기된 이유는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의사-환자 관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의사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환자는 수동적으로 따라야 했던 과거의 모델에 대한 비판 속에서 도입된 선택이라는 개념이 이제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표현이 모든 윤리적 논쟁을 종식시키는 요술 지팡이처럼 여겨지고, 치료의 긍정적, 부정적 결과를 환자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 전가시키는 경향을 띠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환자 선택을 중시하는 대표적 모델은 시장 기반의 소비자 모델이다. 이 모델에서 의료는 명확하게 정의된 상품 또는 서비스의 집합으로 간주되며, 환자는 합리적으로 상품을 고르는 고객 또는 목표 집단으로 상정된다. 여기에서 의료진은 옵션을 제공하는 판매자 역할을 하고, 환자는 제시된 메뉴판에서 최선의 것을 고르는 소비자가 된다. 시장 모델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이 상호작용은 거래적이며, 상품 구매가 완료되고 나면 관계가 종결된다. Mol [12]은 이 모델이 의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의료에서 좋은 돌봄은 상점에서 물건을 사듯 단번에 끝나는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개방적이며, 경계가 없고, 상호작용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는 고통스럽고 끈기 있는 돌봄 과정을 필요로 한다. 상품 모델은 일부 의료서비스 영역에 타당할 수 있겠지만, 질병을 관리하는 과정의 복잡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명확히 구분된 상품과 거래의 틀 안에서 의료서비스의 제공과 이용 과정을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선택의 논리가 전제하는 환자는 자신의 몸과 삶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율적인 시민이다[12].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체를 단련한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처럼 성숙한 시민 환자는 자신의 신체를 길들이고 통제해야 할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키는 몸(troubling body) 가지고 살아가는 환자의 구체적인 경험은 이와 거리가 멀다. 질병의 몸을 지닌 상태에서 겪는 의존은 극복해야 할 실패의 징후가 아니라, 함께 탐색하고 대응해 나가야 할 현실이다. 자율성과 선택을 절대적인 가치로 내세우는 시민 모델은 아픈 몸이 겪는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의 현실을 간과하며,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환자의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선택의 논리는 선택과 통제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심어주지만, 질병의 과정에는 우리가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선택의 논리는 아픈 사람의 상태를 잘못 판단하고 있다. 질병으로 인해 두렵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사람이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선택의 논리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돌봄의 논리다. Mol [12]은 선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현실을 더 잘 설명하고, 더 나은 실천 방안을 모색할 필요를 제시한다. 의료가 지향해야 할 좋은 돌봄이란 높은 수준의 합리성을 갖춘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질병을 앓는 몸으로 복잡한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환자의 필요에 맞는 방안을 찾고 제공하는 것이다. 돌봄의 과정은 지식, 기술, 질병을 앓는 몸, 그리고 복잡한 삶의 조건과 같은 끈적끈적한 변수들을 서로 맞춰나가는 지속적이고 섬세한 조정 과정이다. 질병을 완전히 정복하겠다는 환상 대신,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그 속에서 최선의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을 시도하는 이 과정은 조율(attunement)이라고 표현된다. 미리 정해진 계획을 선형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시도하고 수정하는 실천의 과정이 돌봄 의료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돌봄은 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돌봄 팀(care team)에는 의사, 간호사, 환자, 가족 등의 사람, 혈당 측정기, 약물과 같은 하드웨어, 나아가 환자의 신체 그 자체까지 팀원으로 참여한다. 즉 돌봄은 사람과 사물의 하이브리드적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돌봄 과정에서 의사는 팀의 중심 역할을 한다. 그리고 환자는 환자는 의료진, 기술,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질병과 함께 좋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의미에서 능동적인 존재가 된다.
자원의 제약을 고려하는 의료서비스
현재 한국의 의료는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과 인프라를 자랑하지만, 그 이면에는 급격한 고령화, 지속 불가능한 의료비 증가, 과도한 연명 의료, 의료의 상업화 심화 등 복합적인 난제들이 산적해 있다. 특히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어떻게 살릴 것인가'라는 기술적 구호에 밀려 여전히 주변부를 맴돈다. 의료서비스 제공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Callahan [13]은 사회적 한계 설정, 의학의 목표에 대한 사회적 합의, 세대 간 형평성과 같은 질문을 제시하여 미국의 성장지향 문화 및 의료시스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죽음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현대 의학의 기술 지상주의와 값비싼 연명 의료 기술의 남용이 개인의 삶의 질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의료 자원을 낭비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노년층에게 과도한 의료 기술을 적용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한계 설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의학에서 죽음은 실패로 간주된다. 그리고 환자와 의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낀다.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기술을 활용하고, 이런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은 질병에 대한 합리적 대응으로 여겨진다. 더 긴 생명에 대한 끝없는 욕구는 의료 발전과 기술 혁신을 핵심 가치로 삼도록 사회를 움직인다. 어떤 기술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사용해야만 한다는 문화적, 의학적 경향은 기술적 지상명령처럼 작동한다. 이런 사회에서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가치와 가용한 모든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는 혼동되곤 한다. 이러한 경향은 노화나 죽음과 같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을 정복해야 할 질병으로 취급하는 의료화(medicalization) 현상으로 이어진다. 의료비 위기는 유한성과 자연적 한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보험제도와 의료공급 모델의 일부를 변경하는 것과 같은 해결책을 활용해서는 결코 의료비 상승을 억제할 수 없다.
근본 원인인 기술 숭배에 대한 반성 없이 개혁을 추진하는 담론은, 제한 없는 발전과 성장이 지속될 수 있다는 환상을 대중에게 심어주면서,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대화를 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다. 무한한 수명 연장이 아닌, 평화롭고 의미 있는 삶의 마무리를 의료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기술에 의존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대신에 인간다운 삶의 마무리를 의미하는 좋은 죽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인류세와 지속가능성
2014년 Lancet은 공중보건에서 지구건강으로 보건의료시스템의 지향점을 전환해야 한다는 선언을 실었다[3]. 이 선언은 그 동안 바람직한 의료시스템이 갖추어야 할 목표로 여겨지던 보편적 의료나 의료비 상승 억제, 의료 질의 향상, 환자 안전, 예방, 건강증진 등을 넘어서 건강 문제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기후 변화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사회의 모든 영역의 힘을 집결하여 지구 행성의 건강(planetary health)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건의료시스템을 개혁하자는 이 선언은, 인류에게 닥쳐오는 위협을 (1) 인간의 건강과 안녕에 대한 위협, (2) 우리 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위협, (3) 인간 삶의 바탕인 자연시스템과 인공시스템에 대한 위협이라는 세 가지로 요약했다. 과잉생산-과잉소비를 조장하고 있는 현재의 경제시스템은 불공정하고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제한 없는 진보라는 생각은 위험한 환상이라고 지적한 후에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생산-소비 관행이 시급히 변혁되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인간의 활동과 지구의 시스템은 독립적이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지구행성 차원에서 경제시스템을 바라보아야 하고, 지구행성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상당부분이 건강 문제이므로 보건의료 분야가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호소를 담았다.
지구행성 보건의료는 생태 변화와 인류의 건강, 그리고 번영이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연결 관계가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결과 이 개념은 “먼저 해를 끼치지 말라(first do no harm)”는 Hipocrates의 권고를 개인 환자 차원을 넘어서 인간 집단 전체, 나아가서 미래 세대의 건강과 안녕과 관련된 지구의 자연환경 시스템 전체 차원으로 확장시킬 것을 요구한다.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건의료 전 분야의 대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기존 보건의료시스템의 운영과 성과를 기후 위기라는 새로운 관점을 통해서 바라볼 때 해결해야 할 과제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한국 의료 개혁을 위한 제언
한국 의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최근 몇 년간 한국의료계가 겪은 경험은 지금까지 한국 의료가 지향해 온 방향과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필수의료를 제공할 의사가 부족하니 의사를 늘리자’는 주장은 의료시스템 내부의 복잡한 난맥상을 외면한 채 의사수라는 외형적 요소에만 관심을 갖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어떤 의사를 어떻게 양성하여 어떤 의료를 제공할 것인지, 그리고 이들이 어떤 제도적 틀 안에서 의료 행위를 하게 되는지에 대한 고민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현재의 논쟁은 의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의료 행위의 본질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으며, 새롭게 등장하는 의료 기술이 의료 이용과 의료공급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활동에 대해서 지구가 보이는 급격한 반응에 대한 대처의 필요성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다. 그렇다면 한국 의료 개혁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설정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는 무엇인가?
한국의 의료시스템 전환에서 고려해야 할 첫 요소는 생태적 측면의 지속가능성이다. 환경 측면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건의료시스템 전반을 점검하고, 생태적 측면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해서 변화시켜야 할 요소들을 찾아내고 의료공급과 이용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구행성 보건의료 프레임워크는 보건의료시스템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1) 보건의료서비스 수요의 감축, (2) 의료서비스 수요에 맞는 만큼의 의료서비스를 양질로 공급하는 것, (3) 보건의료서비스 공급 과정의 탄소배출 최소화하는 것으로 요약했다[15]. 이러한 과제해결을 위한 세부적 방안으로 제시된 내용을 보면, 의료 수요의 감축을 위해서는 건강에 대한 사회적 결정요소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건강증진과 질병 예방, 만성질환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수요와 공급의 일치를 위해서는 일차의료와 지역사회 의료서비스를 강화하고, 제공되는 의료서비스의 양과 질 측면에서 적절성을 확보해야 하며, 주어진 자원을 가능한 한 절약해야 한다고 했다. 나아가 보건의료서비스 공급 과정에서의 탄소배출 감축을 위해서 친환경 인프라 구축 및 운영, 보건의료서비스 전달체계의 연속성 확보, 의료 관련 물품 운송과 환자 이동 과정에서의 탄소배출 최소화, 의료관련 물품 공급망의 순환 경제 체제 구축을 통한 폐기물 감축, 정보통신기술 활용의 확대할 것 등이 제시되었다.
이와 같은 시스템 전환을 위해 추진되어야 할 세부과제들이 있다[16]. 첫째는 보건의료시스템의 지속가능성 과학(sustainability science)을 발전시켜야 한다.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보건의료와 관련된 자원 사용 및 탄소 배출량을 조사하여, 탄소발자국을 계산해야 한다. 임상 프랙티스들, 약품 및 의료기기들, 의료서비스 공급 모델 등에 대해서 탄소발자국을 계산해야 보건의료서비스와 관련된 모든 항목에 대해서 전주기 재고(life cycle inventory)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를 모니터링해야 무엇을 어떻게 줄이고 바꿔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보건의료시스템 내에 순환 경제(circular economy)가 자리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감염 방지를 위해 사용하는 일회용품은 폐기물의 양을 늘려 환경을 오염시킨다. 감염관리와 환경보호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감염 규제 기준을 지속가능성에 맞추어 조정하거나 새로운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 일회용품과 관련된 기준의 조율을 위해서는 감염관리 전문가와 지속가능성 전문가의 협력이 국제적 수준에서 필요할 것이다. 일회용품 이외에 의료시설의 건축, 냉난방, 공조 등과 관련된 기준에 대한 조율도 필요하다.
셋째, 보건의료 분야의 성과 측정 및 보고시스템에 지속가능성 지표를 통합시켜야 한다. 보건의료서비스의 가치를 계산할 때 개별적인 환자에 대해서 미치는 치료 성과 이외에 모집단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하고,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보건의료 분야에서 가치(value)를 평가할 때 환경 측면의 지속가능성도 주된 고려요소로 추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건강보험제도 안에서 진료행위와 재료에 대한 보상 수준을 결정할 때 고려할 요소에 환경 측면을 추가하는 것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보건의료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환경의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전문성을 갖춘 보건의료 전문가의 육성이 시급하다. 지속가능성을 지향하는 사회 전체의 전환을 위해서 보건의료 전문가들의 리더십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환경 측면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보건의료 전문가들의 지식과 관심은 매우 부족한 것으로 지적된다. 한 연구는 눈앞에 있는 환자의 치료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료인에게 환경 보호까지 요구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인식이 큰 것으로 보고했다[17]. 지구행성 보건의료 및 보건의료분야의 지속성 과학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의료인 양성 및 재교육 과정에 추가되어야 한다.
다섯째, 보건의료 분야의 연구개발 주제에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주제가 추가되어야 한다. 제약 및 의료기기의 친환경 설계(green design)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고, 임상 프랙티스 방식에 대한 연구에서도 환경의 지속가능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미국내과학회에서 현명한 선택(choosing wisely)으로 추천하는 바람직한 임상 관행[18]과 신장투석 분야에서 발표한 ‘지속가능한 신장치료 권고안’을 예로 들 수 있다[19]. 이러한 연구는 의학을 중심으로 하되 여러 학문 분야의 전문지식을 결합하는 학제적 연구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연구를 위한 연구비의 확충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여섯째, 보건의료계는 사회 전반의 지속가능성 증진을 선도해야 한다. 경제적 불평등, 음식물, 도시 설계, 운송 방법 등이 사회적인 요소들은 보건의료와 직접적 관련성은 낮아 보이지만 사람들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이들 영역의 설계와 운영이 친환경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여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줄이는 의료계의 관심이 필요하다.
일곱째, 보건의료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의 보상 방식에 대한 조정도 필요하다. 수가 제도는 의료이용과 제공량에 영향을 미친다. 환경 보호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시도되어야 할 것이 의료수요와 제공의 증가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보상 방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은 새로운 의료이용과 공급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까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져 온 의료이용과 공급 방식은 이전의 기술적 기반 위에서 정립된 것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을 기존의 틀 속에 집어넣는 대신에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을 활용하여 더욱 환경친화적인 방식의 의료이용과 공급 모델을 고안해내야 한다.
한국의 의료시스템 전환에서 고려해야 할 둘째 요소는 치료에서 돌봄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와 생각의 전환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가능하다. 현재 의료계를 지배하는 치료 중심 의료는 모든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질병을 근절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초점을 맞추며, 종종 공격적이고 기술적인 개입을 통해 이를 추구한다. 이에 대비되는 돌봄 중심 의료는 고통의 완화, 삶의 질 향상, 그리고 만성 질환과 유한성 속에서 잘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초점을 질병 자체에서 환자의 전인적 안녕으로 이동시켜, 치료의 한계를 인정하고, 치료가 더 이상 불가능하거나 단지 미미한 이득만을 제공할 때 돌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자는 입장이다.
이 제안은 자연적 수명에 대한 고려로 연결된다. Callahan [13]은 생물학적 최대 가능 연령이 아닌, 삶의 가능성이 대체로 실현되었다는 관점에서 자연적 수명을 정의했다. 이 시점 이후의 죽음은 실패나 아니라 견딜 만한 죽음(tolerable death), 즉 슬프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으로 여겨야 한다. 자연적 수명을 다한 이후에는 의학적 개입의 목표를 생명 연장에서 고통 완화로 전환하자는 제안이다. 이러한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연명의료결정법의 실질화를 통해 현행법을 넘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과도한 의료 행위를 지양하고 완화의료 및 호스피스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한편, 질병의 진단과 치료 이외에, 질병 예방과 만성질환 관리, 건강 증진 등 돌봄 행위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고, 환자와의 긴 상담, 만성질환 교육, 다학제 팀 진료 등 돌봄 행위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보상하는 지불 제도를 만들어가야 한다. 지불제도의 개편은 지역사회 주치의 제도, 통합 돌봄 클리닉 등 돌봄의 논리를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의료서비스 공급 모델의 개발과 지원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병원들은 병상수, 외래환자 수, 고가 장비 도입 건수 등 양적 지표 중심의 경영에서 벗어나, 환자의 삶의 질 개선, 존엄한 죽음 보장, 의료진의 소진 방지 등 질적 지표를 중요한 경영성과 지표로 고려하는 경영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최첨단 시술 경쟁에 매몰되기보다 만성질환 관리, 재활, 완화의료, 환자 교육 등 지역사회의 돌봄 수요에 부응하는 병원이 장기적으로 더 높은 신뢰와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혁의 추진 방법: 하이브리드 포럼의 구성
미국에서 전공의 근무시간을 제한하려는 개혁에 대한 저항 사례는 선의로 시작된 의료 개혁이 현장의 복잡한 현실과 충돌하며 좌절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외과의들의 저항은 비합리적인 고집이 아니라, 직업적 정체성과 가치를 형성해 온 뿌리 깊은 제도적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사례는 관료적 명령체계를 통한 개혁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현장의 복잡성과 고유한 문화를 무시한 채 외부에서 설계된 표준화된 해결책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외과의들이 개혁에 저항한 것은 그들이 환자 안전에 무관심하거나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수십 년간 내면화해 온 전문직 논리가 무시되고, 의료와 교육 현장의 현실이 거의 존중되지 못한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의료 개혁은 단순히 기술적인 규칙을 바꾸는 과정이 아니라, 의료 전문가로서의 정체성, 역할 관계, 권위 구조, 그리고 문화를 재편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성공적인 의료 개혁을 위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전략을 제언할 수 있다. 첫째, 상향식 접근의 도입이 필수적이다. 개혁의 설계 단계부터 전공의, 전문의 등 현장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켜야 한다. 그들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예: 교육의 질, 환자 치료의 연속성)를 개혁안에 실질적으로 반영함으로써, 개혁의 수용성을 높이고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둘째, 역할과 책임의 구체적인 재정의 및 지원이 필요하다. 개혁으로 인해 발생하는 역할 변화, 예를 들어 전문의의 교육자로서의 책임 강화나 진료보조인력(PA)의 역할 확대 등을 명확히 해야 한다. 단순히 '무엇을 하거나 하지 말라'고 규제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업무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인프라(충분한 대체 인력, 교육 프로그램, 적절한 보상 체계 등)를 함께 구축해야 한다. 셋째, 다중적 현실의 인정과 유연한 적용이 요구된다. 모든 병원에 획일적인 기준을 강요하기보다는, 각 병원의 규모, 특성, 환자군의 중증도 등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유연하게 이행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단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는 대신, 다양한 형태의 좋은 실천이 공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실무적으로 말하자면 여러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체, 즉 하이브리드 포럼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포럼의 최상위 목표는 의사 수 조정와 같은 제한된 쟁점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변화를 수용하는 가운데 생태적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보건의료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참여자는 정부, 대한의사협회뿐만 아니라, 전공의·전임의 대표, 간호사 대표, 환자 단체, 병원 경영진, 보건의료 전문가 등 모든 이해당사자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존 이해당사자 외에 환경 전문가, 기후·보건 전문가, 미래세대 대표 등을 포함시켜 논의의 범위를 인류세의 도전까지 확장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이 회의체에서 논의되는 의제는 의대 정원뿐만 아니라,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필수의료 수가 정상화, 의료 전달체계 개편, 지역의료 지원 방안 등 모든 현안을 포함해야 한다. 앞의 현안을 논의하되 의료 부문의 탄소 중립 로드맵 개발, 의료 자원의 순환 경제 모델 도입, 기후 변화 적응을 위한 공중보건 시스템 강화 등 지속가능성 의제의 바탕 위에서 논의되도록 해야 한다.
이 포럼의 운영은 결론을 정해놓고 설득하는 자리가 아니라, 현장 기반의 파일럿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설계하고 평가하며 점진적으로 신뢰를 쌓고 합의 모델을 만들어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결론
한국의 의료 개혁 논쟁은 필수의료와 의료전달체계라는 좁은 영역의 쟁점에 갇혀 사회 전체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한국 의료계의 위기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낡은 시스템이 새로운 현실이라는 빛에 의해서 치부를 드러내는 증상이다. 따라서 해법 또한 낡은 틀 안에서의 미봉책이 아닌, 패러다임 자체의 전환을 목표로 해야 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시대적 비전이다. 성장 중심적, 치료 중심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인간과 지구의 건강을 동시에 증진하는 ‘지구행성 건강 프레임워크’는 새로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요구한다. 이 선서는 개별 환자에 대한 책임을 넘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 공동체의 건강까지 고려하는 확장된 윤리를 담고 있다. 인구의 고령화와 만성질환의 증가는 효과적인 돌봄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있으며, 제한된 자원의 세대적 배분에 대한 관심도 요구한다.
우리는 최근의 위기를 성장주의의 관성에서 벗어나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돌봄 공동체라는 새로운 희망의 모델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는 우리와 미래 세대의 건강한 삶을 위한 시대적 소명이다. 정책 입안자, 의료기관, 임상 전문가, 그리고 시민 사회 모두가 이 전환의 여정에 동참해야 한다. 국민 건강의 최종수호자 역할을 맡고 있는 의료인들은 이 여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의료계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지키면서 지속가능한 의료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 연구는 일부 제한된 자료에 근거하여 한 사람의 연구자가 던지는 하나의 제안일 뿐이다. 그러나 이 제안이 더욱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대화를 촉진하여 한국의 의료가 현 세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건강과 안녕을 보장할 수 있는 모습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