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사의 사회적 역량

Social competencies of Korean doctors

Article information

J Korean Med Assoc. 2014;57(2):114-120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14 February 14
doi : https://doi.org/10.5124/jkma.2014.57.2.114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학과
Department of Medical Education, Ewha Womans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Seoul, Korea.
Corresponding author: Ivo Kwon, kivo@ewha.ac.kr
Received 2014 January 06; Accepted 2014 January 20.

Abstract

'Social competence' is understood in behavioral science and developmental psychology to be a bundle of diverse social skills that are necessary for appropriate social adaptation. However, a physician's social competence in our healthcare context should be understood as clinically necessary skills that are not directly related to understanding of the natural sciences essential for clinical practice. In Korea, such 'non-science competencies' have long been ignored by both doctors and laypeople in their understanding of medicine as a discipline. However, the clinical practice should embrace the centrality of humane and social elements, without which medicine could not exist. Our research team has proposed 6 competencies in light of the current Korean healthcare context and circumstances: understanding of the related law and healthcare system, professionalism and ethics, leadership, self-management, communication, and understanding of the humanities. These competencies are important to current medical practice in Korea and should be developed and promoted among doctors in the present and future. Of course, these competencies are not absolutely fixed or unchangeable. They should be re-interpreted or modified as time passes and the healthcare context changes. However, for the time being, these competencies will provide some guidance for educating doctors and promoting dialogue among related stakeholders in the healthcare field.

서론

의사의 '사회적 역량'이라는 말은 사실상 어디에도 없는 표현이다.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사회적 역량'을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데 사용한다. 그런데 부득이하게도 의료의 맥락에서 '사회적 역량'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 한국의 의사들이 처해 있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사회적 역량'에 대칭되는 개념은 '임상적 역량(clinical competencies)'일 것이다. 그리고 15개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의료 만족도 조사에서 최고 수준으로 나타난 국민 의료서비스 만족도가 보여주듯이[1], 한국 의사들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예후를 판단하고, 환자를 재활하는 역량은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임상적 능력'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이렇듯 환자를 잘 진단하고 치료하는 능력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진단 능력'이란 환자가 보여주는 증상과 증후, 각종 지표들을 바르게 판단하여 이미 가지고 있는 표준 질병분류표의 한 갈래로 잘 끼워 넣는 능력을 의미한다. 또한 '치료 능력'이란 해당 질병에 대해 이미 표준화된 치료법, 즉 약물, 수술, 혹은 기타 시술들을 확립된 방식대로 잘 구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의학은 엄밀 과학(hard science)이어야 한다는 이상에 잘 들어맞고, 한국 사회에서 의학, 그리고 이것을 수행하는 의술이란 어디까지나 엄밀한 과학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시술하는 의사들에게 요구되는 것도 과학자, 또는 기술자의 엄밀성과 정확성이었다. 즉 이러한 맥락에서는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들의 역량과, 예컨대 자동차의 이상을 진단하고 수리하는 전문 자동차 수리공의 역량은 본질상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의료의 실제 모습과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 그러한 괴리가 일어나는 이유는 의료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 때문인데 이는 크게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는 의술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불확실성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질병 분류 자체는 완벽하지 않고 늘 새로운 질병 현상의 등장과 함께 재조정되고 있는 지침이며, 덧붙여 어떤 개별 환자에서도 그 증상과 증후들이 교과서적 증례에 완전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증상과 증후 역시 질병의 진행에 따라 변화하는데 그러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항상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또한 모든 치료 역시 환자의 선행 병변과 병력, 그를 둘러싼 물리적, 생물학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꼭 들어맞는 치료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는 치유자로서의 의사의 존재이다. 의사는 환자의 증상과 증후를 연역하여 병을 찾아내는 컴퓨터가 아니라 질병이라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사건에 함께 참여하는 파트너이며, 때로는 그 의술의 목적이 질병으로부터 환자를 벗어나게 하는 치료(cure)가 아니라, 그 질병을 견뎌 내며 환자가 세상을 맞서게끔 돕는 돌봄(care)일 때도 많다. 후자의 경우 무엇이 가장 적절한 돌봄인가는 환자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셋째는 의술이 일어나는 가치적인 맥락, 즉 윤리적이고 법적인 맥락의 존재이다. 어떠한 치료가 최선의 치료인가에 대해서는 때로 환자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며, 이는 의사의 생각과 충돌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정된 의료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는가에 있어서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며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료의 실천, 즉 의술은 언제나 이를 규율하는 사회의 윤리적, 법적, 제도적 환경 속에서 수행되기 마련인데 그러한 윤리적, 법적, 제도적 환경은 인간의 다른 제도들처럼 불확실하며 불분명하다. 이 세상의 어떤 의술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 세 가지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사들은 이 세 가지 맥락 속에서 항상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의술의 이러한 성격은 실천(praxis)이라는 단어가 잘 보여준다. 실천이란 이론(theoria), 혹은 단순한 기예(techne)와는 구별되는 어떤 것으로 이론을 현실의 문제에 적용하여 해결을 모색하는 노력이다. 그 과정에서는 경험, 식별, 그리고 지혜가 중요하며 이럴 때 필요로 하는 지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라고 부른다[2]. 의술이 임상적 실천(clinical practice)인 이유는 여기에 있으며, 사실 시술을 잘 하는 시술가(practitioner)에게는 지식과 이론 못지 않게 '지혜'가 중요한 것이다. 즉 임상시술가(clinical practitioner)인 '의사'에게는 임상적 역량(clinical competences)이란 이론적 지식과 수기(skill)못지 않게 실천(practice)을 제대로 하기 위한 수많은 능력을 뜻한다. 즉 실천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사회적 역량'이라는 어색한 용어를 취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굳이 '사회적 역량'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한국 사회가 '의술'의 본질에 대한 생각이 얕고, 이 문제를 고민해볼 기회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즉, 전근대 사회에서 의술은 여러 이유로 선비가 되지 못한 이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마지못해 하는 생업인 경우가 많았으며, 그러한 의술이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의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으로서 의술 자체를 그다지 고상한 활동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진지한 사유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한편 근대 이후에 수입한 서양 의술은 의(醫)의 물질적 측면에만 집중하였으며, 이를 배운 의사들은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근대 자연과학 지식을 습득하는 데 급급하였지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다양한 역량과 맥락에는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 그러한 측면들은 모두 '의술은 인술(仁術)'이라는 식의 전근대적 프로파갠더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실천(practice)의 심오한 요소들은 의(醫)의 수입 과정에서 상실되었다. 의술이란 환자에 대한 실존적 실천이자, 항상 사회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실천이라는 생각이 채 들어올 기회가 없었다.

'사회적 역량'이란 임상적 역량 중 '순수한' 엄밀과학인 의학지식이나 구체적인 수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요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조작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정의가 필요한 이유는 실천으로서의 의술 개념이 부재한 사회에서 그러한 조작적 정의만으로도 어떤 교육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의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술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의사의 역량에 대한 추구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한국 의사의 사회적 역량 도출을 위한 노력

'사회적 역량'이라고 별도로 부르지는 않아도 여러 나라에서 의사의 공통 필수 역량을 도출하기 위한 노력은 과거로부터 있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캐나다의 CanMEDS이다. CanMEDS는 캐나다 의사회 회원들과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15년 이상을 토론하고 연구하여 만든 것으로 의사가 해야만 하는 7개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의료전문가(medical expert), 의사소통자(communicator), 협력자(collaborator), 건강 옹호자(health advocate), 관리자(manager), 학자(scholar), 전문직(professional)이다. 영국은 General Medical Council에서 제정한 Good Medical Practice(GMP)를 가지고 있는데 2013년도 판인 GMP(2013)은 의사의 의료 실천을 네 가지 영역으로 구분하여 지식, 기술, 수행; 환자 안전과 의료의 질보장; 의사소통과 파트너십, 팀워크; 신뢰의 유지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영역이 대체적으로 '사회적 역량'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미국의 경우에는 전공의 교육과 평가를 담당하고 있는 기구인 Accreditation Council for Graduate Medical Education에서 전공의 교육과정의 6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는데 환자 진료, 의학 지식 , 실무에 근거한 학습, 대인관계 및 의사소통, 전문직업성, 의료제도 내에서의 업무 수행이 그것이다[3].

우리나라에서도 의사의 다양한 자질과 필요한 역량에 대한 고민은 2000년부터 있어 왔다. 2000년 한국의과대학장협의회는 '21세기 한국의학교육계획-21세기 한국의 의사상(醫師像)'을 발간하여 1) 기본적 의학지식과 수기에 익숙하며 평생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의사; 2) 의료 현장에서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며 이를 처리하는 능력을 가진 의사; 3) 전인적인 치료와 더불어 질병 예방과 건강 증진을 수행할 수 있는 의사; 4) 의료에 영향을 주는 인문, 사회과학 분야 지식과 의료관리 능력을 갖춘 의사; 5) 도덕적이고 이타적이며 지도자적인 의사를 양성할 것을 21세기 의학교육의 목표로 내세웠다[4]. 이후 2008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전공의의 핵심 역량으로 'REPECT 100'을 내세웠는데 이는 타인에 대한 존중(respect), 윤리(ethics), 환자 안전(safety),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 수월성(excellence), 의사소통(communication), 팀웍(teamwork)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5]. 이후 2012년에 의학교육평가원은 대한의사협회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 의사의 역할과 덕목 : The Global Role of the Doctor in Health Care, The Country Report of Korea'를 발간하였는데 여기서는 환자 진료, 소통과 협력, 사회적 책무성, 전문직업성, 교육과 연구, 관리와 리더십으로 의사의 역할을 구분하였다[6].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팀은 한국 의사가 갖추어야 할 여러 덕목과 역량들 중 특히 '사회적 역량'을 도출하기 위해 전문가 토론과 문헌 조사를 통하여 6가지 역량의 목록을 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교육적인 필요성, 환자의 만족도, 의료의 질 향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역량을 우선하되 기존의 의학교육에서 강조하던 술기(skill) 중심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역량의 목록을 도출하였다. 이 목록은 6개 영역(법률과 제도의 이해, 프로페셔널리즘과 윤리, 자기관리, 리더십, 의사소통, 인간과 사회의 이해)으로 구성되며 이를 가지고 만 19세 이상 69세 미만의 국민 600명을 대상으로 하여 설문조사를 수행하여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의료업무에 종사하는 다양한 직군의 의사 288명을 대상으로 하는 웹기반 설문조사를 시행하였고, 또한 개원의 및 의대 교수를 대상으로 연구진이 도출한 사회적 역량에 대한 심층인터뷰와 질적 조사를 수행하였으며 공직자 및 비의사 보건의료인 등 의료 유관 이해관계자를 대상으로 하는 심층인터뷰와 질적 조사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본 연구진이 도출한 6가지 항목의 '사회적 역량'이 한국의 의사들에게 의미 있는 덕목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의사의 사회적 역량

의사는 한정된 의료자원을 활용해야 하는 보건의료 제도 내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의료 행위에 대해서는 여러 법적인 제약이 따르므로 이 과정에서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하여 법률과 제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전문직업성과 윤리에 기초한 양질의 진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기 관리를 할 수 있어야 하며, 지역사회는 물론 국가 차원에서 국민의 건강 증진과 안녕에 공헌하기 위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환자와 보호자, 동료 의료인은 물론 진료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원활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1. 법률과 제도의 이해

근대 국가에서 의료는 항상 어떤 제도적 틀 내에서 관련 법규의 감독과 규제 하에 이루어진다. 국가는 의료인을 교육하고, 면허를 허락하며, 의료인의 질을 관리하고, 의료 행위를 감독한다. 의사의 직업적 자율성과 함께, 법률은 의료 행위를 규율하며 의료와 관련된 제반 상황을 통제한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가장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고 싶어 하지만, 한정된 의료자원으로 모든 환자의 욕구를 다 충족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며, 고도로 발전한 현대 의료는 점점 더 많은 비용을 소모하고 있다. 여기서 의사는 가장 양질의 진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환자에 대한 책무와 한정된 의료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해야 한다는 사회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한정된 의료자원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곧 의사의 서비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의사와 정부 간에 격렬한 갈등의 소지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현실의 의료 문제들을 적절히 다루며 날로 복잡해지는 의료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의사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의료제도를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이해당사자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는 의료란 이 세상에는 없으므로 의사는 의료를 둘러싼 이 근원적인 긴장을 이해하고 그러한 속에서 자신의 책무와 권리를 숙지해야 한다. 아울러 필요한 경우에는 문제가 있는 의료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개인적인, 그리고 전체 직역의 차원에서 노력해야 한다.

의료서비스가 점점 더 중요한 사회의 기능이 되면서 정부는 의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 의료 서비스 공급자로서의 의사는 의료의 경영과 관리, 행정의 차원에서 해당 법규와 관련 제도를 잘 알 필요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보건의료기본법'과 '의료법'이 의사의 의료행위를 규율하는 양대 축이며, 이외에도 전염병 관리, 혈액 관리, 장기 이식, 의학 연구 등 다양한 의료 관련 사안에 대해 수많은 법규들이 있으며 그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해당 법규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지는 바로 해당 의사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의사는 이러한 점을 숙지하여야 하며,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세부 내용뿐 아니라 전체적인 법률의 운영 방식과 행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

또한 의료행위에 있어서 환자와의 의료분쟁이나 의료과오는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며, 이런 일들을 사전에 예방하고 혹시 발생하더라도 그 여파를 최소화시키는 것이 의사의 책무이겠으나 법적 분쟁으로까지 가게 된다면 그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는 법 역시 알아야 할 것이다.

2. 프로페셔널리즘과 윤리

프로페셔널리즘은 전문직업성이라고도 하며 때로는 이 안에 전문직 윤리(professional ethics)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프로페셔널리즘의 세 축은 수월성(전문성)과 자율성, 그리고 전문직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굳이 '윤리'를 구별한 이유는 현대 의료가 발전하면서 기존의 전문직 윤리로 해결하기 곤란한 많은 어려운 쟁점들이 생겨났고, 의사가 이런 쟁점들을 잘 다루는 역량도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전문직 윤리는 환자를 보호하고 환자의 이득을 자신의 이해관계보다 우선시하는 일종의 신사도라고 할 수 있지만 현대의 임상윤리는 그러한 선의 만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문제들도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배우자간 체외수정술을 받으러 온 부부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은 고전적인 전문직 윤리이지만, 그러한 시술을 과연 허용해야 하느냐는 때로 전문직 윤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프로페셔널리즘의 세 가지 기틀 중에서 수월성, 즉 아무나 습득할 수 없는 탁월한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한국의 의사들에게 이미 익숙한 부분이고, 또 대다수의 의사들이 세계 수준의 의학 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프로페셔널리즘의 두번째 축, 즉 자율성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가 가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선진국만큼 충분히 성숙하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즉 위계와 국가의 통제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한국 문화에서 개인이나 특정 직역의 자율성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으며, 의사가 근대 도시 중산층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서구와는 달리, 전통 사회의 의사란 선비가 되지 못한 중인에 불과하였다. 또 근대 의학 자체가 일제 강점기를 거쳐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 의사들은 자율적인 발전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이후에도 한국 전쟁과 권위주의 정부를 거치면서 정부와 관료 집단에 대응할 수 있는 자율과 자치의 역량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윤리 역시 마찬가지인데, 근대 윤리의 핵심인 개인의 자율성과 존엄에 대한 존중, 그리고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은 인정과 공동체의 선을 중시했던 전통 윤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의 의사들에게는 전문직의 자율성과 전문직 단체의 역할에 대한 이해, 임상윤리에 대한 기본적 지식과 윤리적 민감성, 그리고 윤리적 갈등 상황에서의 문제 해결능력과 이해상충을 잘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

3. 자기관리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을 열심히, 또 오래 하는 국민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7] 한국인 중에서도 의사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의사의 탈진은 이미 선진국에서는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8], 의사 자신들을 위해서뿐 아니라 환자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탈진증후군(burn out syndrom)에 걸린 의사는 제대로 된 판단과 의사결정, 또는 시술을 하기 어려워 환자 안전에 위해가 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기관 중심 의료(institutionalized medicine)에서 의사는 점점 더 많은 역할을 요구받고 있으며, 그러한 역할은 종종 상충한다. 뿐만 아니라 의사 역시 인간으로서 가족과 함께 하는 생활이 있고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과 취미 및 여가 활동이 있다. 이러한 생활은 단지 휴식과 재충전의 가치뿐 아니라 삶을 의미있게 살아가게 해 주는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직무와 개인 생활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 객관적 자기평가와 스트레스 관리, 그리고 시간 관리 능력이 필요하다. 또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멘토십이나 롤모델 등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4. 리더십

리더십은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고, 올바른 비전을 제시하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 비전을 함께 추구하고, 그 성과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의사에게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는, 첫째, 현대 의료는 다양한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팀 단위로 제공되는데 이때 의사는 그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하며, 둘째, 의사는 환자 또는 환자 집단에게도 리더십을 행사하여 자신의 치료 전략에 대한 순응도를 높여야 하며, 세번째, 지역사회, 또는 국가의 보건의료문제에 대해 전문가로서 영향을 행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보건의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다양한 직군과 사회 활동에서 의사들에게 리더십이 요구된다.

리더십을 위해서는 예리한 지성과 통찰력, 책임감과 헌신성, 설득력과 감화 능력, 그리고 타인이 자신을 신뢰하게끔 하는 핵심 요소인 솔선수범과 청렴성이 필요하다. 리더십 못지 않게 팔로어십(followership)도 필요한데 이는 올바른 리더를 선출하고, 일단 선출하였으면 민주적 질서에 따라 리더를 돕고 그가 제시한 비전을 기꺼이 따라가려는 자세를 의미한다. 리더와 팔로어는 고정된 역할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화할 수 있으며, 민주적 질서는 이를 보장한다.

5. 의사소통

의사소통 능력은 의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선 환자와 의사 관계에서 의사소통은 환자로부터 관련된 정보를 끌어내고, 환자로 하여금 의사의 치료 전략을 수긍하고 이에 순응하게 만들며, 환자를 위로하고 치유 효과를 촉진하기 위해 필요하다. 때로 적절한 말 한 마디가 어떤 약보다도 좋은 치유 효과를 내기도 하며, 심지어 대안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환자와 의사 관계의 신뢰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여러 조사들은 우리나라 의사들에 대해 환자들이 갖는 불만 중 상당수가 의사소통에서 기인함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팀 어프로치가 필요한 현대 의료에서 관련 동료 의료인과 협력을 하고,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의사소통을 잘 해야 한다. 한국 의사들이 스스로는 '오피니언 리더'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 전체의 견지에서 볼 때 설득력 있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도 있다.

6. 인간과 사회의 이해

의료는 사회적 맥락에서 실천되는 인간학이다. 탄생과 투병과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 사실뿐 아니라 이를 겪는 인간에게는 매우 심각한 '실존적 문제'이기도 하다. 타인의 은밀한 실존적 문제에 깊숙히 개입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사는 매우 독특한 직업이며, 그 개입을 잘 하지 못한다면 환자에게는 물론 본인 자신도 실존적인 외상을 입을 수 있다.

또한 의사는 의술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직업인기도 하며, 이는 의료제도 및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의사가 흰 가운으로 상징되는 고립과 고독과 권위의 영역에서 행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여러 차례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으면서 한국의 의사들은 이제 막 그러한 현실에 눈을 뜨고 있는 중이다. 흔히 인문사회학이라 일컬어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의(醫)와 별개의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의(醫)의 중요한 일부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와 통찰이 없이 바른 의(醫)의 실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특정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깊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라는 뜻이 아니라 의(醫)가 관련된 영역에서 인간과 사회의 특정한 측면을 통찰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라는 뜻이다. 의학의 역사, 의철학, 의료인류학과 의료사회학 등은 그러한 통찰을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문학과 연극, 영화 등 예술은 인간이라는 실존적 현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울러 이러한 지식과 소양은 의사가 자신의 삶에서 의술이 갖는 의미를 추구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결론

의사의 '사회적 역량'이라는 억지스러운 단어로 '의(醫)의 실천(medical practice)'의 본질적인 어떤 측면을 굳이 묘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백여년 전 서양 근대 의학이 이 땅에 들어온 이래 겪어야 했던 굴절된 역사를 보여준다. 주체적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억압당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해석한 근대를 강요당했으며, 국가와 시민사회와의 관계가 제대로 설정되지 못한데다가 전문직의 자율성이 성장할 겨를이 없었던, 그리고 '근대'와 '근대 의학'을 오직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편협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역량'은 이제까지 없었던 뭔가 새로운 개념의 도입이 아니라 의(醫)의 본령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다.

본 연구팀이 설정한 여섯 가지의 '사회적 역량', 즉 법률과 제도에 대한 이해, 프로페셔널리즘과 윤리, 리더십, 자기 관리, 의사 소통,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현 시점에서 한국 의사들에게 시급하다고 여겨지는 역량을 위주로 한 것이며,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시 고찰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의(醫)가 어디까지나 사회적 맥락에서 존재하는 인간 실존을 겨냥한다는 사실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이며, 의업의 가치와 의사의 전문직으로서의 존엄이 자리한 곳 역시 의(醫)가 갖는 그러한 본질일 것이다.

Peer Reviewers' Commentary

본 논문은 한국 의사의 사회적 역량이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룬 것이다. 한국 의사의 임상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이에 비하여 환자를 대하는 의료사회적 능력면에서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취약부분에 대한 환자, 의사에 대한 설문을 기초로 6가지 핵심 역량을 이끌어내고 이를 설명한 매우 의미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있는 현 의료계에 내부성찰을 위한 중요한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정리: 편집위원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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