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기이식 역사의 시작, 이용각(1924-2016)
The beginning of the history of organ transplantation in Korea, Yongkak Lee (192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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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1924년 경기도 남양에서 태어난 이용각은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며 의학 세계에 첫발을 들인다. 애초 그의 꿈은 세균학자였다. 세균학자로 출발한 이용각은 마침내 대한민국 최초로 신장이식을 성공시킴으로써 장기이식과 혈관외과 분야의 거두로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
공업화의 시대, 즉 기계 부품들의 쉼 없는 교체와 작동에서 나라의 미래를 찾던 1960년대, 이용각은 한국 최초로 고형 장기이식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용각의 집도로 대한민국 최초로 신장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는 재미교포였다. 미국의 병원들마저 포기한 상황에서, 재미교포 환자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당시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던 명동 성모병원의 이용각을 찾아 고국으로 날아온 것이다. 1969년 3월 25일, 마침내 이용각은 내과 전문의 민병석(1929-1083) 등과 조직을 꾸려 재미교포 환자 어머니의 신장을 기증 받아 신장이식을 성공시켰다. 이는 대한민국 장기이식 역사의 서막을 알리는 대사건이자, 혈관외과 명의로 거듭난 이용각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였다
이용각은 어떻게 이 모든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가? 이용각은, 그 일생을 바쳐 어렵게 배우고 익히며 축적한 의료 지식을 총동원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신장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용각의 일생에서 빠질 수 없는 사건은 바로 6.25 전쟁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용각은 종군을 결심하고 의무장교로 복무하기에 이른다. 이 때 이용각은 미국에서 파견된 외과의들의 뛰어난 실력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들의 실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용각의 회상에 따르면, 미국의 군의관들이 목숨을 걸고 부상병을 살려 내던 야전텐트는 곧 “굉장히 큰 작은 텐트”였으며[1], 이곳에서 이용각은 후일 미국 의학계를 주도하게 될 젊고 실력 있는 의사들의 뛰어난 의술을 배운다. 바로 그 야전텐트에서, 이용각은 동맥이식을 비롯한 다양한 혈관 봉합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의 야전병원은 이동 외과병원, 혈관외과, 마취과와 신경외과가 한 팀을 이루어 치료하는 협진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었다. 긴박한 전쟁터에서 죽어가던 군인들을 살려내는 협진 시스템의 작동을 이용각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후일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재직하던(1962-1989) 이용각은 산하 성모병원에서 꾸준히 동맥수술을 비롯해 복부대동맥류, 대동맥 협착증, 신동맥 협착성 고혈압증 치료 등에 필요한 혈관외과 수술을 진행해 나갔으며[2], 그의 제자들 또한 협진에 바탕을 둔 다양한 혈관외과 수술 기법을 착실히 익힐 수 있었다. 전국의 수많은 혈관외과 환자들이 이용각을 찾게 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더 많은 수술을 진행함에 따라 이용각과 그의 팀의 수술 실력은 날로 발전해갔다[3]. 바로 여기에 이용각 팀이 ‘대한민국 최초의 신장이식 성공’이라는 개가를 올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 정확하고 빠르게 혈관을 봉합 하는 일이 신장이식 수술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의료적 성과가 이용각 개인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여기서 이용각의 탁월한 조직 구성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신장이식수술의 결정적인 걸림돌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면역 거부를 다스리는 일이다. 바로 이 분야에서 명동성모병원의 민병석 박사(1929-1983)는 다년간의 미국 수련 및 연수를 통해 최첨단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용각은 수술로 시작하는 신장이식의 전 과정을 진행하면서 민병석 박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의료진을 한 팀으로 꾸리는 조직 구성 능력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최초의 신장이식 성공은 ‘협진’의 결과였다. 당시 이용각은 민병석과 함께 외과, 신장내과, 비뇨기과, 이식외과, 마취과, 정신과, 혈액투석기 전문가 등 약 30여 명으로 이루어진 이식팀을 구성하였고[4], 바로 이 ‘협진’ 시스템이 대한민국 최초 신장이식 성공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이용각의 조직 구성 능력은 후일에도 계속해서 발휘되는데, 후일 그는 대한 이식학회(1969), 대한맥관외과협회(1985)를 창립하여 그의 조직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의학 지식을 후대에 전할 수 있는 ‘제도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용각이 이룬 의료적 성취의 저변에는, 시대적 소명에 응답하려는 그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시절, ‘대동아 공영’이라는 일제의 구호가 허구임을 간파한 이용각은 자신이 조선사람이라는 정신을 그 누구보다 깊이 새기고 있었으며, 이러한 정신은 그가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더욱 의학 공부에 매진하도록 한 원동력이었다[5]. 6.25 전쟁 중에도 나라의 부름을 받은 그는, 연구실을 떠나 ‘의사 군인’의 길을 택해 전장으로 향한다. 전쟁의 참상에서 벗어나 근대화를 외치며 나라의 틀을 바꾸어 가던 1960년대의 시대 정신은 곧 공업기술에 바탕을 둔 강력한 과학국가의 건설에 있었다. 당시 과학기술처는 『과학기술장기전망과 종합 적기본정책』을 발표하며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었고, 이 청사진에 포함된 ‘장기이식’은 조국으로부터 의료 분야에 주어진 소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용각과 그의 조직이 1969년 성공시킨 최초의 신장이식 수술은 근대화를 열망하는 조국의 부름에 대한 한 응답이기도 했던 것이다[6].
일제 말기에 의학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용각은 험난한 시대의 폭풍을 헤쳐왔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대한민국은 6.25 전쟁의 참상을 겪었고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나라를 일으킨 근대화의 과정 또한 분명한 명과 암을 지닌 시기였다. 이 폭풍과도 같은 20세기를 관통하며, 이용각은 ‘의학’이라는 확실한 지식이자 태도를 나침반 삼아 놀라운 집중력으로 한 길을 걸어 불치의 병을 앓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의학은 과학의 법칙을 기본으로 삼아 세상과 사람을 향해 유익한 선(善)을 창출하겠다는 태도이자 약속이기도 하다. 과학과 학문의 목적이 점점 더 모호해지는 요즘, 확실한 지향으로 의학이라는 한길을 걸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사한 이용각의 삶이 더욱 의미심장한 이유다.
Notes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