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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orean Med Assoc > Volume 66(9); 2023 > Article
한국 감염학의 태두, 전종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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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은 우리를 끈질기게 찾아온다. 1940년대 후반, 한국에 항생제가 도입되어 세균성 감염에 종말을 고하는 듯하자 항생제 내성 균주가 출현했고, 새로운 항생제가 개발되어 내성균 문제를 해결하자 이제 신종 바이러스 감염이 우리를 습격한다. 그러나 감염병의 변화무쌍한 공격에도 우리는 매번 그에 맞설 방법을 찾아내 왔다. 다소 헤매는 일도 있지만, 감염병에 대한 대응은 거듭 발전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한국 감염학의 태두, 전종휘가 진료 현장과 실험실을 오가며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초석이 놓여 있다.
전종휘는 1913년 8월 6일 함경북도 성진에서 부친 전원규와 모친 안경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6명의 형제 자매가 있었으나, 누나 1명과 남동생 2명을 빼고는 모두 어린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부친과 누나는 교육자이자 독립 운동가였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전종휘는 그런 가풍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길렀다. 학령기가 된 그는 함흥 소재 기독교계 학교인 영생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26년 3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로 편입했다. 그리고 1931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고, 1935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직후 전종휘는 경성부립순화병원에 임용됐다. 부임할 때에는 몰랐지만, 그곳은 그의 오랜 감염병 연구가 시작된 곳이었다. 순화병원은 감염병 환자의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었다. 당시 순화병원에는 한때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의 조교수였던 시바 요시야(椎葉芳彌)가 원장으로 있었다. 그는 유명한 세균학자 시가 기요시(志賀潔)의 제자로 탁월한 연구자였으며,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는 인격자이기도 했다. 전종휘는 그에게 환자를 대하는 법과 감염병 연구 방법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웠다. 시바의 지도로 전종휘는 일본 뇌염과 열대열 말라리아로 입원한 환자들에 관한 연구 6편을 학술지에 발표했다. 그중 하나는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열대열 말라리아 증례였다.
이후 전종휘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연구 능력을 더욱 개발해 나갔다. 1937년 그는 시바의 주선으로 경성제국대학 제1내과학교실에 들어갔다. 경성제국대학 제1내과학교실의 교육은 진료에 관한 실용적 지침을 가르치기보다 자율적인 연구 역량을 기르는 데 무게를 두었다. 그곳에서 전종휘는 내과의 여러 질병을 연구했다. 이어서 1939년에는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경성제국대학 제2병리학교실에 들어갔다. 그는 강의와 연구에 활용하는 사체의 상태와 부검 기록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 병리학의 기본적인 실습 요령을 공부했고, 1940년 4월부터는 교수의 권유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서 병리각론 강의와 실습을 담당했다. 나아가 교실 전체가 일본병리학회로부터 ‘흡수와 배설의 형태학적 관찰’이라는 주제의 과제를 받자, 전종휘도 그 준비의 일환으로 주요 장기 내 철의 흡수와 배설 기전을 연구했다. 연구 결과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출판됐다.
해방은 전종휘에게 본격적인 감염병 전문가로 성장할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출범하자 그곳에서 감염병을 전담하는 제5내과의 주임교수가 됐다. 해방 직후 한국에는 수많은 해외 동포들이 귀국하며 감염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두창 등 각종 유행병이 창궐했다. 특히 1949년에는 일본뇌염이 크게 유행하여 전국적으로 5,600여 명을 감염시켰다. 제5내과는 하루에 100명이 넘도록 밀려드는 환자를 돌봐야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전종휘는 감염병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망한 환자를 부검하여 죽음을 야기한 바이러스를 검출하는 데 성공했다. 국내 최초의 일본 뇌염 바이러스 분리였다.
병원에서의 진료와 연구 외에도 전종휘는 국가 방역 사업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1946년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그는 미생물학자인 기용숙과 함께 방역 사업을 주도했다. 그들은 전문가로 구성된 방역팀을 조직해서 인천 등의 항구에서 검역소를 운영하며 모든 선박의 탑승자에게 콜레라 감염 여부를 확인했다. 그런 방역 활동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종휘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전시연합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장기려와 함께 피난민 무료 진료 사업을 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정부와 군의 방역 사업에 힘을 보탰다. 이어서 1960년 한국 군대에 만연한 유행성출혈열을 박멸하기 위해 유행성출혈열 연구반이 창설될 때 위원으로서 역학 조사와 환자 진료를 담당했다. 1963년에는 육·해·공 3군의 의무자문관으로 임명됐고 1965년 이후로는 정부의 방역 보건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전종휘는 병원, 실험실, 유행병 발생 현장을 오가며 감염병의 원인 규명과 방역 체계 형성을 위해 분투했다. 이에 더하여 감염학, 나아가 의학의 확립을 위해 그가 헌신한 다른 분야는 의학 교육이었다. 전종휘는 한국 의료계에 활발한 학술 문화를 만들고자 했다. 1955년 8월부터 1956년 9월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미국에서 연수를 받은 그는 그곳의 임상 교육 제도를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의 병원에서는 여러 과의 의사들이 모여 임상 사례를 중심으로 각 과의 소견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임상병리 컨퍼런스(Clinico-Pathological Conference, CPC)와 임상 증례 토의(Medical Grand Round, MGR) 같은 학술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는 교수뿐 아니라 전공의, 학생, 인근 병원의 의사들까지 참여하여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했다. 귀국 후 전종휘는 그런 프로그램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도입했다. 그가 개최한 ‘감염 합동 토론회’는 매주 정례적으로 여러 전공의 의사들을 모아 적극적으로 토론하는 분과간 학술 모임이었다. 그런 시도는 1964년 그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떠나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직한 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매일 진료 시작 1시간 전에 교실 학술 모임을 가졌고, 오후에는 CPC와 MGR 등 분과간 행사를 열었다. 이 같은 학술 프로그램은 이후 다른 학교에서도 실시되어 1960년대 한국 의료계 전반의 학술 교류를 증진했다. 전종휘는 그런 흐름의 선도자로서 감염학과 관련된 여러 학회의 창립과 운영에도 관여했다.
의학 교육에서 전종휘가 강조한 것은 학구적 태도만이 아니었다. 그 이상으로 그가 중시한 것은 ‘환자를 위하는 의사’였다. 그는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재직 시절부터 의사의 ‘인간미’와 윤리 의식, 그리고 ‘환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할 줄 아는 능력을 강조했다. 이런 교육 철학은 1978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정년 퇴임 이후 그가 초대 학장으로 부임한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육 과정에 적극적으로 반영됐다. 의학 교육의 목표를 학문적 기여보다 환자의 필요 충족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의료문제연구소’를 설치했고, 농어촌 의료, 일차의료, 응급의료 등에 관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스스로도 의학적 현안 및 의학의 사회적 의미를 다루는 ‘의학개론’이라는 과목을 개설했다. 그 수업 자료는 1985년 동일한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1993년 전종휘는 현직에서 물러나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의 명예교수가 됐다. 그리고 일생의 경험을 토대로 의학사에 관한 여러 저술을 남긴 뒤 2007년에 별세했다. 그는 한국 감염학의 성장에 평생을 바친 학자이자 방역가이자 교육가였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을 감염학이라는 분과에만 묶어둘 수는 없다. 그의 활동은 한국 방역 체계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진료실, 실험실, 방역 현장을 넘나들며 얻은 통찰은 ‘환자 중심’의 의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교육 철학을 의학계 전반에 남겼다. 그의 유산은 의료와 사회의 갈등이 빈번해진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복잡해진 현실에서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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