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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orean Med Assoc > Volume 64(4); 2021 > Article
한국 기초의학의 개척자, 윤일선
기초의학의 위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백신 주권’이 국가의 명운을 결정하는 세계적 유행병 시대에조차 기초의학이 외면받는 현실은 단순한 소외감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기초의학은 짧은 기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고,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근현대사의 탁류에 휩쓸려 우여곡절을 겪었을지언정 결코 무르지 않은 역사를 동호(東湖) 윤일선(尹日善)이라는 심지 곧은 개척자가 일구어낸 덕분이다.
윤일선은 1896년 10월 5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아버지 윤치오(尹致旿)와 어머니 이숙경(李淑卿)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윤치호(尹致昊)가 당숙, 윤보선(尹潽善)이 사촌이다. 당시 망명 중이었던 윤치오는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도쿄외국어학교 한어학과에서 외국인 교사로 강단에 서기도 하였다. 윤일선은 1903년부터 가톨릭 마리아회가 설립한 교세이(暁星)소학교에 다녔고, 1906년 7월에 귀국한 후 일본인 학교인 히노데(日出)소학교와 경성중학교를 차례로 졸업하였다. 1916년 9월 일본 오카야마(岡山) 제6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의학에 뜻을 두고 의과대학 지망자 코스인 제3부를 선택하였으며, 1919년 9월 교토(京都)제국대학 의학부에 진학하였다.
그해 교토제국대학 기독교청년회 기숙사에 입사한 것을 계기로 당시 청년회 이사장이었던 병리학교실의 후지나미아키라(藤浪鑑) 교수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후지나미는 도쿄제국대학의 야마기와 가쓰사부로(山極勝三郞)와 더불어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병리학자로, 세포병리학의 창시자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를 사사한 인물이다. 의학부 시절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을 두고 고민한 끝에 “질병의 근원과 싸움으로써 의학 발달의 기초가 되는 것이 더 보람 있는 일”이라며 기초의학을 선택한 윤일선은 졸업 후 병리학교실에 들어가 피르호에서 후지나미로 이어지는 근대 병리학의 정수를 계승함으로써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병리학자가 된다.
처음에는 경제적 형편이 안 되어 병리학교실의 무급 부수로 들어갔지만, 이듬해인 1924년에는 후지나미의 호의로 대학원에 등록하고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 재학 중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교수 제의를 거절하면서까지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러한 열정을 높이 산 후지나미로부터 연구실과 연구비를 전폭적으로 지원받았고, 임상학적 진단과 병리학적 진단의 대비, 외부 요인이 종양에 미치는 영향 등의 연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심한 설사병을 앓고 호전되지 않자 결국 1925년 9월에 자퇴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요양 후 후지나미의 추천으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장 시가 기요시(志賀潔)를 통하여 내분비병리의 권위자인 도쿠미쓰 요시토미(德光美福)의 병리학교실에 채용되었다.
유급 부수와 조수를 거쳐 1928년 3월에 병리학교실 조교수로 임용된 윤일선은 한국인으로서는 경성제국대학 최초이자 해방되기까지 1년 이상 재직한 유일한 전임교원이었다. 아나필락시스와 호르몬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며 많은 논문을 내었고, 이를 바탕으로 1929년 1월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하지만 그는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을 떠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적을 옮겼고, 1930년 5월부터 교수로 재직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은 안정적인 연구환경을 제공하였지만, 철저히 일본인 중심의 기관이었던 만큼 한국인 인재양성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윤일선의 부임 이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도서실과 실험실을 갖추고 일본식 교실제도를 도입하며 사립학교 최초의 기초의학 연구기관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는 정력적인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펼치며 수많은 한국인 제자를 길러내었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문부성 지정학교로 승격시킴으로써 졸업생이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만주에서도 의료행위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외적으로도 조선의사협회의 창설과 한국어 학술지 ‘조선의보’의 창간을 주도하는 등 식민지의 엄중한 상황에서도 한국의학의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다만 대학원 과정이 없는 전문학교의 한계로 인하여 제자들의 박사학위 취득은 교토제국대학을 비롯한 일본 대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일본병리학회와 교토제국대학 병리학교실 동창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데에는 그러한 상황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1937년에는 약 7개월간 구미를 시찰하며 견식을 넓히고 세계적인 병리학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해방이 되자 그의 행보는 더욱 빨라졌다. 극도의 사회 혼란과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경성대학 의학부장을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 및 초대 대학원장을 지내며 대학교육 재건에 힘쓰는 한편, 대한의사협회의 전신인 조선의학회 및 조선의학협회(대한의학협회)를 발족시키고 1949년에는 세계의학협회에 가입시켰다. 1946년에 조선병리학회(대한병리학회)를 창립하여 초대부터 제16대까지 회장을 맡았고,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을 초대부터 제6대까지 역임하였다. 1955년 서울대학교 부총장에, 1956년에는 교수회의 신임에 힘입어 제6대 총장에 올라 역대 최장인 5년 2개월 동안 집무를 보았다. 은퇴 후에도 원자력원 원장, 한국과학기술후원회 및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쉬는 법이 없었다.
특기한 만한 점은 그가 1946년 4월 경성대학 의학부에서 한국 최초로 의사학을 강의하였고, 1947년 4월 기초의학 분야 학회로는 네 번째로 조선의사학회(대한의사학회)를 출범시켜 초대 이사장(학회장)을 맡았으며, 9월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동아시아 최초의 의사학교실을 설치하는 데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찍이 의사학의 가치를 깨닫고 한국 의사학의 태동에 크게 기여한 것은 교토 유학 시절의 영향이었다. 의학이 전문화될수록 그것을 종합하고 총괄하는 의사학의 존재 의의가 커진다며 병리학 연구와 더불어 의사학적 계몽활동을 펼친 스승 후지나미의 뜻에 감화된 것이다. 또한 당시 교토부립의과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서울대학교 의사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김두종(金斗鐘)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걸출한 의학자이자 교육자이자 행정가로서 한국 기초의학을 맨손으로 개척한 윤일선은 한국 근대 의학사상 희유하고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대한제국 개화기부터 대한민국고도 성장기에 이르기까지 최고 엘리트로서 한국의 학술 전체를 대표한 그를 기초의학의 개척자로만 평가하기에는 크게 부족할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일본어가 더 익숙하였던 그가 제국의 공간과 제도를 유감없이 가로지르고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식민지인 고향 땅에서 한국의 기초의학을 위하여 일관되게 헌신한 모습은 마치 해방 이후를 대비한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는 1987년 6월 22일에 영면하였지만, 그가 역사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지핀 불씨는 밝게 타오르고 있다. 이를 더욱 키워서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것은 온전히 우리 후학의 몫이자 사명이다.

Notes

Conflict of 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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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윤일선
약력
1896년 10월 5일 일본 도쿄에서 출생
1923년 6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졸업 및 동 대학 병리학교실 부수로 연구 시작
1928년 3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병리학교실 조교수 임용(1929년 4월 사임)
1929년 1월 교토제국대학 의학박사 학위 취득
1930년 5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임용
1937년 7개월간 구미 의학계 시찰
1945년 9월 경성대학 의학부장
1946년 10월 조선병리학회(대한병리학회) 창립 및 회장(초대-제16대) 취임
1946년 10월 서울대학교 교수 및 초대 대학원장 취임
1947년 4월 조선의사학회(대한의사학회) 창립 및 회장 취임
1947년 5월 조선의학협회(대한의학협회) 창립 및 학술위원장 취임, 이후 제2, 3, 7대 회장 역임
1954년 4월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초대-제6대) 취임
1956년 7월 서울대학교 제6대 총장 취임
1987년 6월 22일 서울에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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